1️⃣ ‘제국’의 공간, 환구단에서 역사를 만나다
지난 30편에서 우리는 ‘제국’이라는 말이 근대 한국 사회에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 그 낯설고도 강력한 단어가 조선 말기에서 대한제국 선포를 통해 어떤 변화를 불러왔는지 살펴보았다. ‘제국’은 단순한 명칭을 넘어 당시 동아시아의 힘의 균형 속에서 새롭게 등장한 근대 국가의 정체성을 의미했다. 특히 이 개념은 고종 황제가 환구단에서 거행한 황제 즉위식이라는 상징적 공간을 통해 현실로 구현되었다. 환구단은 1897년 10월 12일 대한제국 황제 즉위식을 거행한 장소로, 당시 세계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려는 고종의 의지가 함께 담긴 근대 국가의 출발점이었다. 이곳은 단순히 제사를 지내던 제단을 넘어서 근대 국가로서 새로운 자존과 위상을 세상에 선포한 상징적 공간이다. 이번 편에서는 환구단이라는 출발점에서 정동으로 이어지는 근대 서울의 주요 역사 현장을 탐방하는 여정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그간 글에서 다룬 ‘제국’의 의미가 실제 공간에서 어떻게 살아 숨 쉬었는지를 체감할 수 있을 것이다.
2️⃣ 환구단: 대한제국의 시작과 근대 국가의 상징
환구단(圜丘壇)은 본래 중국 고대 제천 의식에서 유래한 제단으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중요한 의식 공간이었다. 조선은 이를 차용하여 왕이 하늘에 제를 올리는 의례를 치렀으나, 환구단이 근대적 국가로 전환되는 결정적 공간이 된 것은 대한제국 수립과 함께였다. 고종 황제는 1897년 환구단에서 황제 즉위식을 열며, 전통과 근대를 아우르는 새로운 국가 체제를 알렸다. 이는 그가 단순한 조선 왕이 아닌 황제로서, 동아시아에서 자주적 국가로 자리매김하려는 의지를 상징했다. 환구단은 서울 중구 소공동에 자리 잡고 있으며, 당시 환구단 주변은 근대 외교와 교류의 중심지인 정동과 인접해 있어 더욱 의미가 깊다. 환구단은 한반도의 전통적 제천 의식을 근대 국가주의의 상징 공간으로 전환하는 공간적·정치적 장치였다. 또한 환구단은 1910년 일제강점기 이전까지 대한제국의 국가적 행사와 제천 의례가 이루어진 장소로, 근대 서울에서 ‘제국’의 정신이 가장 생생하게 구현된 공간으로 기억된다. 환구단 주변에는 당시 이를 둘러싼 다양한 근대적 변화의 흔적들도 남아있다. 이를 통해 당시 조선이 전통과 근대를 동시에 수용하며 복합적인 정체성을 형성해 가던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3️⃣ 정동 일대: 근대 서울의 국제적 공간과 문화 교류
환구단에서 걸어서 15~20분 거리인 정동(貞洞)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근대 서울의 중심 외국인 거주지로 자리 잡았다. 정동은 당시 조선 정부와 외국 공관이 밀집해 있었고,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와 교회가 들어서며 근대 서구 문물이 본격적으로 유입된 공간이었다. 이곳에는 미국 공사관, 프랑스 공사관, 영국 공사관을 비롯해 다양한 외국인 관련 시설들이 있었으며, 덕수궁과도 가까워 왕실과 외국 세력의 접점 역할을 했다. 정동 일대는 조선의 근대 외교와 국제 교류, 선교 활동이 활발히 이루어진 역사적 공간이자, 근대적 문물과 사상이 최초로 본격적으로 들어온 장소로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정동길을 따라 걷다 보면 덕수궁 석조전, 배재학당, 정동교회 등 역사적 건축물들을 만날 수 있다. 이 건축물들은 서양의 건축 양식을 도입해 근대화된 왕실과 교육·종교기관의 모습을 보여주며, 당시 조선 사회가 겪은 변화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한다. 특히 배재학당은 미국 선교사 아펜젤러가 설립한 근대 교육 기관으로, 근대 인재 양성의 요람이자 사회 변화의 중심 역할을 담당했다. 정동교회 역시 한국 최초의 서양식 개신교 교회로, 근대적 종교 변화와 선교 활동의 산실이었다. 이처럼 정동 일대는 단순한 외국인 거주지에 그치지 않고, 조선이 근대화의 길목에서 맞닥뜨린 세계와의 접점이자 소통 창구 역할을 한 곳임을 알 수 있다.
4️⃣ 덕수궁 석조전: 고종 황제의 꿈과 근대 권력의 상징, 그러나 완성하지 못한 이상
덕수궁 석조전은 고종 황제가 대한제국의 근대적 위상과 국제 사회에서 자주적 국가임을 과시하기 위해 착공한 서양식 석조건물이다. 1900년대 초에 건립을 시작한 이 건물은, 고종이 세계열강과 동등한 위치에서 대한제국의 위상을 세우고자 한 근대화와 자주독립의 염원이 담긴 상징적 공간이었다.
그러나 고종 황제는 1907년 일본의 압력으로 강제로 퇴위당하며, 그 꿈을 완성하지 못한 채 정치적 현실의 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석조전의 완공은 고종의 폐위 이후인 1910년경 이루어졌고, 이미 대한제국은 일제에 의해 강제 병합된 상태였다.
이에 따라 석조전은 본래의 의미와 달리 일본 통치 시기의 여러 행정 용도로 활용되며, 대한제국의 독립과 근대화를 상징하는 건축물이지만 동시에 주권 상실의 아픈 역사를 품은 공간으로 남았다.
석조전은 웅장한 서양식 건축 양식을 통해 대한제국의 자주권과 현대 국가로서의 위상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려 했던 고종의 꿈을 담고 있다. 오늘날 덕수궁 석조전은 근대 한국사에서 국가 주권 회복의 간절한 염원과 좌절을 동시에 기억하게 하는 역사적 유산으로 평가받고 있다.
5️⃣ 환구단에서 정동까지, 역사와 기억을 걷는 답사
환구단에서 정동까지의 거리는 불과 1.5km 내외지만, 이 짧은 구간은 근대 대한제국의 이상과 현실, 그리고 근대 서울의 변화를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의미 있는 여정이다. 답사자들은 이 길을 따라 걸으며, 단순히 공간을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의 정치적·사회적 맥락을 체감하고, 근대 한국이 맞닥뜨린 내외적 도전과 변화를 재발견하게 된다. 환구단에서 시작된 ‘제국’의 꿈이 정동의 외국 공관과 근대적 건축물들 속에서 현실화하고 좌절되는 모습을 온전히 느낄 수 있다. 또한 이 답사는 근대 역사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지금의 서울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되돌아보는 소중한 기회가 된다. 앞으로 다음 편에서는 정동 각 주요 지점과 건축물들을 하나씩 깊이 있게 다루며, 환구단 답사기 시리즈를 이어가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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