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경운궁(慶運宮)에서 덕수궁(德壽宮)으로: 환구단의 여파와 황궁의 재배치
1897년 환구단에서 대한제국이 선포되고 고종은 황제로 즉위하며 조선 왕조를 넘어 새로운 국가 정체성을 선언했다. 이는 동아시아에서 일본, 청나라 등 강대국 사이에서 조선이 자주국으로서 위상을 요구하는 중대한 정치적 사건이었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한 칭호 변경을 넘어 국가 주권과 근대화를 향한 의지의 표출이었다.
고종은 1896년 아관파천 당시 러시아 공사관으로 임시 거처를 옮겼다가, 1897년 돌아와 경운궁을 황궁으로 삼았다. 경운궁은 원래 조선 후기의 작은 궁궐이었으나, 정동 일대에 자리 잡아 당시 근대 외교의 중심지와 가까웠다. 이에 따라 고종은 경운궁을 ‘근대 국가의 얼굴’로 만들고자 궁궐 내에 서양식 서재와 근대적 사무공간을 설치하여 전통과 근대가 공존하는 공간으로 조성했다.
그러나 1904년 경운궁은 큰 화재를 겪게 된다. 이 화재는 경운궁의 많은 전각을 소실시키고 황실에 큰 타격을 입혔다. 특히 고종이 머무르던 부분도 피해를 보았으나, 다행히 인명 피해는 적었다고 전해진다. 이 화재 사건은 대한제국의 불안한 정치 상황과 맞물려 권력 기반을 더욱 약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재건 과정에서 근대식 건축 양식을 적극 도입하며 근대 궁궐로서의 위상을 더욱 강화하려는 시도가 이어졌다.
1907년, 고종 퇴위 이후 경운궁은 ‘덕수궁’으로 공식 명칭이 변경되었다. ‘덕수’는 덕망과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으나, 그 시기는 대한제국이 점점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주권을 잃어가는 암울한 시기였다. 덕수궁은 대한제국 권력의 상징이자 몰락의 현장으로 자리매김했다. 이곳은 근대 국가로의 전환과 자주 국가 수립의 꿈을 품었으나, 결국 외세에 의해 짓눌린 현실을 보여주는 공간이기도 했다.
덕수궁은 오늘날에도 근대 한국사에서 자주와 종속, 개혁과 침탈이 교차한 중요한 역사적 장소로 남아 있다. 환구단에서 시작된 대한제국의 이상과 꿈이 덕수궁에서 어떻게 구체화하고, 또한 좌절되었는지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공간이다.
2️⃣ 석조전: 비운의 건축과 일제강점기의 변모
덕수궁 내 석조전은 대한제국의 근대적 위상과 국제 사회에서의 자주국임을 상징하려는 고종 황제의 의지로 1910년에 완공되었다. 그러나 완공되기 약 3개월 전인 1910년 8월, 한일합병으로 대한제국이 멸망하면서 석조전은 본래 계획했던 황궁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다. 고종 황제는 1907년 일본의 압력으로 퇴위한 후 석조전을 거주지로 사용하지 않았으며, 그의 황제의 꿈은 현실에서 좌절되었다. 석조전은 주로 귀빈 접대와 만찬 장소로 활용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석조전이 ‘이왕가미술관’으로 개조되어 1933년부터 일반인에게 개방되었다. 이 시기에는 일본 근대 미술품만 전시되었는데, 이는 일본 미술가들이 조선 미술품과 함께 전시되는 것을 반대했기 때문이다. 이후 1938년에는 서관이 완공되어 조선 고대 미술을 전시하는 ‘조선고대미술진열관’이 되었고, 석조전은 일본 미술을 전시하는 공간으로 활용되며 문화적 분리가 심화되었다. 이는 일제가 조선 문화를 통제하고 억압하려 했던 사실을 잘 보여준다.
또한, 석조전 앞 분수대의 상징물도 일제강점기 때에 전통적 거북이상에서 서양식 물개상으로 교체되었다. 이 변화는 조선의 정통성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서구화된 이미지를 강요한 일제의 문화 정책을 반영한다.
이처럼 석조전과 주변 공간은 대한제국의 이상과 꿈이 좌절된 현장이자, 일제의 식민 지배와 문화적 통제가 복합적으로 드러나는 상징적인 장소였다. 환구단에서 시작된 대한제국의 이상이 이곳에서 어떻게 무너져 갔는지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적 현장이다.
3️⃣ 마지막 황제, 순종(純宗)의 삶과 제한된 군주권
순종(1874~1926)은 고종의 아들로 1907년 고종이 일본의 압박으로 퇴위하자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로 즉위했다. 그러나 순종의 즉위는 명목상의 것이었고, 이미 대한제국은 일본의 실질적 지배하에 놓여 있었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한 대한제국은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했고, 1907년 이후 순종은 사실상 통치 권한이 없는 군주로 남았다. 모든 실권은 일본 통감부에 있었으며, 순종은 의례적인 행사와 황실 의무를 수행하는 데 그쳤다.
순종은 한일합병 이후 ‘이왕’이라는 명목상의 지위를 부여받았으며, 일본 제국의 통치 아래 정치적 권한을 박탈당하고 실질적 권력이 없는 형식적인 군주로 남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종의 존재는 식민지 민족운동에 상징적 의미를 부여했다. 1926년 순종이 사망하자, 전국적으로 추모 물결이 일어났고, 이를 계기로 6·10 만세운동이 발발하는 등 일제 강점기 민족의식의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다. 순종의 삶은 대한제국의 종말과 일제 강점기 민족 투쟁이 맞물린 시기의 역사를 상징한다.
4️⃣ 덕수궁의 오늘: 기억과 교육의 장소로서의 변용
오늘날 덕수궁은 대한제국의 영광과 몰락, 그리고 근대 한국사의 격동을 고스란히 간직한 역사적 공간이다. 석조전, 중화전, 정관헌 등 남아 있는 전각들은 대한제국 시기의 정치, 외교, 문화 현장을 생생히 재현하며 소중한 문화재로 평가받고 있다.
덕수궁은 단순한 관광지를 넘어, 대한제국의 자주 국가 꿈과 일본 제국주의의 침탈, 그리고 민족의 저항과 기억이 공존하는 상징적 공간이다. 현재는 다양한 전시관과 해설 프로그램, 역사 탐방 코스를 통해 시민과 학생들이 근대사와 황실의 일상, 근대화의 노력, 일제강점기 억압과 민족 저항의 역사를 입체적으로 체험하고 배울 수 있는 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덕수궁은 환구단에서 시작된 대한제국 서사가 이어지는 중요한 역사적 장소이자, 오늘날 근대사의 교육적 가치와 시민적 의미가 공존하는 공간으로서 그 역할을 굳건히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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