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표현 방식 속 외교의 거리
19세기 말, 한양의 서쪽 변두리에 위치한 작은 마을 정동(貞洞)은 불과 수십 년 만에 조선의 국제 외교 중심지로 급격히 변모했다. 덕수궁을 둘러싼 돌담길을 따라 걷다 보면, 전통 한옥과 기와지붕 대신 붉은 벽돌과 첨탑, 아치형 창문을 갖춘 서양식 건물들이 곳곳에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서울 한복판에 유럽과 미국의 도시 일부가 옮겨온 듯한 이질적인 풍경이었다.
당시 기록과 사진 자료에 따르면, 정동 일대에는 러시아 공사관의 붉은 벽돌과 탑이 인상적이었고, 영국 공사관 등은 유럽식 건축 양식을 띠었다. 미국 공사관저의 경우 초기에는 현지 한옥(목조 가옥)을 매입해 사용했으며, 이후 점차 서구식 요소가 가미된 건물로 변화해 갔다. 이러한 건축 양식의 혼재는 단순한 미관의 변화가 아니라, 조선이 외세와 접촉하며 세계 질서 속에 본격적으로 편입되는 물리적 증거였다.
당시 신문과 외국인의 여행기들은 화려한 수사보다는 사실적 기록에 집중했다. 예컨대 미국인 선교사 헨리 아펜젤러는 덕수궁 돌담 너머로 보이는 서양식 건물과 그곳에서 들려오는 마차 소리, 그리고 외국인들의 복장이 한양 내 다른 지역과 확연히 달랐다고 여러 차례 기록했다. 이는 단순한 감상이 아니라, 실제로 조성된 외국인 거주지와 외교 공간을 생생하게 묘사한 것이다.
정동은 당시 드물게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공간이었다. 서양 선교사들이 설립한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이 인근에 있었고, 미국 감리교회와 성공회 성당이 가까이 자리했다. 학생, 외교관, 상인, 통역관 등이 이 거리를 오가며 언어와 문화가 뒤섞였으며, 이러한 교류는 곧 조선 사회 전반에 변화를 일으키는 촉매 역할을 했다.
2️⃣ 고종의 아관파천은
1896년 2월 11일, 일본의 내정 간섭과 위협이 극심해지자 고종과 세자는 경복궁을 떠나 정동에 위치한 러시아 공사관으로 향했다. 이 사건은 러시아의 보호 아래 정치적 주도권을 회복하려는 전략적 피신이었고, 이를 아관파천(俄館播遷)이라 부른다.
러시아 공사관은 1890년에 완공된 붉은 벽돌 3층 건물로, 탑과 첨탑이 인상적이었다. 내부는 유럽식 응접실과 회의실로 꾸며졌으며, 고종은 약 1년간 이곳에서 정사를 돌보았다. 그 기간 동안 일본의 영향력은 크게 약화되었고, 러시아가 고종 보호를 중심으로 영향력을 확대했다. 미국 공사관은 고종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일본 세력을 견제하는 역할을 했고, 프랑스 공사관은 천주교 신자 보호와 선교 활동을 지원하는 등 독자적인 외교 노선을 펼쳤다.
아관파천 기간, 러시아 공사관뿐만 아니라 미국과 프랑스, 영국 공사관도 조선 정치의 핵심 협상 무대로 떠올랐다. 외교관과 조선 관료, 황실 인사들이 이곳을 오가며 복잡한 이해관계를 조율했다. 특히 미국 공사관저에서는 고종과 미국 공사 간 비공식 회담이 자주 이루어졌다. 프랑스 공사관은 당시 천주교 관련 사안에 대해 외교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영국 공사관은 조선의 정치 상황 변화에 주목하며, 아관파천 시기 조선 내 불안정한 정세 속에서 지속적으로 자국 이익을 지키기 위한 외교 활동을 벌였다.
3️⃣ 국제정세와 외교 공간의 확장
19세기 말, 정동 일대에 늘어난 외국 공관들은 당시 국제정세를 그대로 축소해 보여주는 ‘미니어처 세계’와 같았다. 미국 공사관저는 1884년 초대 공사 루시어스 푸트(Lucius H. Foote)가 매입한 이후 같은 부지에 자리하며 지금까지도 그 자취를 이어가고 있다. 당시 이 공사관저는 단순한 외교 사무 공간을 넘어, 서양식 연회와 음악회, 도서실이 열리는 문화 교류의 장이었다. 이를 통해 조선의 지식인들은 서구 문물을 직접 접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프랑스 공사관은 주한 프랑스 선교사들과 긴밀히 연결되어 조선 내 천주교 신자 보호와 선교 활동을 적극 지원했다. 한편, 영국 공사관은 일본과 러시아 사이의 세력 균형을 예의 주시하며, 한반도를 자국 해상권 확보를 위한 완충지대로 인식하고 동아시아 전략 거점으로 삼았다.
이 시기 러시아는 시베리아 횡단철도 건설이 진행되면서 극동 지역에 대한 정책을 대폭 강화했다. 한편, 일본은 청일전쟁(1894~1895) 승리 이후 조선을 발판 삼아 만주 진출을 모색했다. 미국과 유럽 열강은 직접적인 식민지화보다는 조선을 무역과 해상권 확보의 거점으로 주목했다.
이처럼 정동의 외국 공관들은 단순한 건물이 아닌, 각국의 이해관계와 전략이 응축된 ‘외교 전초기지’였다. 덕분에 조선의 정치 결정 과정은 점차 이 외교 공간과 밀접하게 맞물렸고, 이는 1897년 고종의 대한제국 선포와 황제권 강화 시도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4️⃣ 정동 현장 답사기 – 공간이 보여주는 모습
오늘날 정동을 걷다 보면, 100여 년 전 조선이 세계와 마주했던 외교 현장의 숨결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경운궁 돌담 너머로 우뚝 선 붉은 벽돌의 러시아 공사관 탑과 첨탑, 그리고 미국 대사관저는 당시의 건물과 정원을 비교적 잘 보존하고 있다. 프랑스 공사관 건물도 현재는 다른 용도로 사용되고 있지만, 견고한 석조 기둥과 문양에서 그 시절 품격을 엿볼 수 있다.
답사길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곳은 중명전이다. 1899년 황실 도서관인 수옥헌으로 지어졌으나, 1904년 경운궁 화재 이후 고종이 집무실 겸 외교 알현 장소로 사용하며 ‘중명전’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중명전은 대한제국의 중요한 외교 무대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강압적으로 체결된 비극의 현장이자, 1907년 고종이 네덜란드 헤이그에 특사를 파견하여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려 했던 장소다. 그러나 일본의 방해로 그 시도는 실패했다.
일제강점기에는 경성구락부로 사용되면서 황실과 외교의 흔적이 희미해졌으나, 해방 이후 복원되어 오늘날에는 역사 교육과 전시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중명전 앞에 서면, 돌담길과 서양식 건물들이 어우러진 풍경 속에서 대한제국의 마지막 저항과 근대 외교의 무게가 절절히 느껴진다.
정동 지역은 단순한 외교 공간을 넘어 조선 근대 교육과 종교 문화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은 이곳에서 서구의 근대 교육을 전파하며 조선 지식인 양성에 크게 기여했다. 또한, 정동교회(미국 감리교회)는 선교뿐만 아니라 사회적 개혁과 문화 교류의 중요한 거점이었다. 이들 기관과 외국 공관이 인접해 다양한 문화와 사상이 한데 어우러진 독특한 공간을 형성했다.
특히, 환구단 답사기에서 다뤘듯이, 고종이 황제로 즉위하며 대한제국의 새로운 국권을 선포한 환구단 역시 정동과 인접한 지역에 있다. 이 공간들은 조선이 전통과 근대, 동양과 서양이 교차하는 ‘작은 세계’로 성장하는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정동 답사는 단순한 과거 여행이 아니다. 돌담길을 걸으며 당시의 시간과 공기가 서린 공간을 느끼고, 서양식 건물의 창문 너머로 조선이 근대 세계로 발돋움하던 순간들을 직접 체감하는 역사 체험이다.
'환구단 답사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덕수궁과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6) | 2025.08.09 |
---|---|
환구단에서 정동까지 – 근대 서울 역사 여행 코스 (9) | 2025.08.08 |
‘제국’이라는 말이 낯설었던 사람들 – 언어와 용어 수용의 역사 (9) | 2025.08.07 |
제국 선포 이후의 공간 변화 : 시각적·행정적 재편 (8) | 2025.08.06 |
대한제국 선포 이후의 국내 담론 – 지식인과 시민사회의 반응 (8) | 2025.08.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