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구단 답사기

[환구단과 정동 공간사②] 정치성과 이데올로기-대한제국기의 '권역 전략'

인포쏙쏙+ 2025. 7. 26. 21:56

1️⃣ 정동, 외교와 권력의 경계선

정동 일대는 단순한 행정·문화 지역이 아닌, 국제 외교와 제국 권위의 경계 지대였다. 이곳은 19세기 말부터 외국 공사관들이 집중되면서 '외교의 길목'이 되었고, 고종은 이를 적극 활용하여 열강과의 외교전 속에서 정치적 생존을 모색했다. 러시아 공사관과 미국 공사관이 나란히 자리한 거리, 그 틈에 위치한 정동교회와 배재학당, 그리고 중명전과 덕수궁은 그 자체로 대한제국의 권역 전략이 얼마나 외교 지형에 의존하고 있었는지를 드러낸다. 정동은 내정(內政)과 외교가 만나는 실질적 경계 공간이었고, 대한제국은 이 공간을 통해 자신이 근대 국제질서의 일부임을 강변하고자 했다.

 

2️⃣ 외교 공간으로서의 중명전: 제국 외교의 전초기지

1901년 덕수궁 화재 이후 고종은 중명전을 거처로 삼고, 이 공간을 외교 실무의 전초기지로 전환해 외국인 자문관들과의 회의 및 국제법적 대응을 주도하기 위해 시작했다. 중명전에서 작성되고 토의된 문서들은 일본의 침탈을 견제하기 위한 방안 마련에 집중되어 있었으며, 국제법 절차와 근대적 외교 문서 형식의 수용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특히 1905년 을사늑약은 중명전을 포함한 외교 공간 일대에서 치욕적인 방식으로 추진되었다. 일본은 외교 협상의 외양을 띠었으나, 실제로는 무력과 협박을 동원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려 했다. 당시 고종은 중명전에서 외교 고문들과 함께 이에 대한 대응 방안을 논의했으며, 끝내 조약 체결에 서명하지 않았다. 이 사건은 중명전을 외세의 침탈에 맞선 상징적 공간으로 각인시켰고, 이후 1907년 고종이 헤이그에 밀사를 파견해 국제사회에 부당함을 호소한 결정도 이 공간에서 논의되었다.

중명전은 단순한 외교 문서의 처리 공간을 넘어, 대한제국의 실질적 외교 활동의 중심이었다. 고종은 이곳에서 국제 정세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미국·영국·러시아 등 주요 강대국의 외교관들과 협상을 이어갔다. 외국인 자문관들에게는 조약 해석과 국제법 분석을 요청했으며, 이를 위한 별도의 숙소와 회의 공간이 중명전 내부에 마련되었다.

더불어 중명전은 대한제국이 지향한 근대국가 모델을 실험한 상징적 공간이기도 했다. 내부에는 서양식 가구, 문서 체계, 난방 및 조명 설비 등이 도입되어 근대적 관료국가의 이미지를 구현하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고종은 이곳에서 국제 여론을 환기하기 위한 밀사 파견을 지시하고, 때로는 정동 일대 외국 선교사들과의 비공식 회동도 이어갔다. 이러한 점에서 중명전은 단순한 내정 공간이 아닌, 국제 정치의 현장에서 대한제국의 자주성을 모색하던 실천적 무대였다.

 

3️⃣ 기독교 공간의 정치화: 정동교회와 서양 세력 활용 전략

정동교회의 성장은 단순한 종교 확산 현상이 아니었다. 고종은 정동교회의 개신교 신자들과 선교사들을 통치의 한 축으로 활용했다. 기독교는 서양 열강, 특히 미국과의 우호적 관계를 맺는 매개였고, 선교사들은 외교 채널의 비공식 중개자 역할을 했다.

미국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는 배재학당 설립자로서 교육과 선교를 병행했고, 이 과정에서 미국 문화와 정치 체계에 대한 지식이 정동을 통해 조선 청년들에게 유입되었다. 정동교회는 단순한 신앙의 공간이 아니라, 고종의 정치적 구상 속에서 미국과의 긴밀한 관계 구축을 위한 문화 외교의 전초기지였다. 이는 고종이 정동 일대를 서구와의 우호 협력 기반으로 삼고자 했음을 시사한다.

특히 정동교회는 단순히 종교 집회소에 머무르지 않고, 서양 문명을 상징하는 복합 네트워크 공간으로 작동했다. 선교사들은 정세를 분석하고, 미국 공사나 본국 선교 기관에 보고서를 정기적으로 전달했다. 이는 조선 내부에서 발생하는 정치적 사안이 정동교회를 경유해 국제사회로 흘러 들어가는 창구가 되었음을 뜻한다. 실제로 대한제국의 위기와 국제 여론 환기를 위해 정동교회를 중심으로 한 외국인 선교사들의 활동은 결정적인 외교 여론 형성의 도화선이 되기도 했다.

정동교회의 영향력은 정치적으로도 구체적 사례로 이어졌다. 정동의 선교사들은 조선의 위기를 미국 정부에 전달하려 했으며, 고종 역시 정동 선교사들과의 회동을 통해 우호 외교를 위한 메시지를 교환했다. 이는 종교적 커뮤니티가 단순한 선교를 넘어, 국가 간의 문화적·정치적 매개체로 기능했음을 의미한다.

정동교회는 공간적으로도 배재학당·여학당·의료시설과 연계되며, 당시 조선 내에서 '서구 문명과 근대화'를 실현하는 복합기지로 작용했다. 고종에게 이 일대는 단순히 종교와 교육의 구역이 아닌, 서양 세력을 우군으로 확보하는 외교·전략적 전초기지였다. 따라서 정동교회는 신앙의 장을 넘어, 정치적 담론과 외교 전략이 실시간으로 교차하는 복합 거점이었다.

 

4️⃣ 상징의 정치, 공간의 전략화

공간은 권력의 구체화이자 상징의 도구였다. 고종이 환구단에서 천제를 올리며 스스로를 '천자'로 선언한 것은 단순한 의례가 아닌 권력 언어였다. 그러나 대한제국의 권역 전략은 의례적 상징을 넘어, 실질적 외교 교섭과 문화 연출이 함께 작동하는 구조였다.

중명전은 고종이 외교 대응과 국제법 논리를 정비하기 위해 활용한 전략 공간이었고, 정동교회는 미국 선교사들과의 문화적 연계를 통해 외교적 메시지를 확산시키는 창구였으며, 배재학당은 근대 지식과 시민 교육의 새로운 모델을 도입하는 교육 거점이었다. 이러한 복합적 공간 분포는 고종이 자주성과 문명국가로서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한 공간 배치였고, 이는 일제의 침략 논리를 반박하고 제국의 자주권을 주장하기 위한 상징적 방패였으나, 열강의 침묵 속에 실질적 효과에는 한계가 있었다. 덕수궁은 전통과 근대가 교차하는 상징적 궁궐이었고, 이 일대를 에워싼 모든 공간은 대한제국이 스스로를 세계 속 국가로 선언하는 무대였다.

이처럼 환구단과 정동 권역은 단순히 제례와 외교, 교육과 종교의 기능적 병렬이 아니었다. 그것은 대한제국이 새로운 국제 질서에 맞서기 위해 설계한 복합 공간 정치의 산물이었다. 19편에서는 이 공간들이 일제에 의해 어떻게 해체되고, 광복 이후에는 어떤 방식으로 기억되거나 잊혔는지를 추적하며, 정치적 공간이 시간 속에서 어떻게 변형되는지를 분석하려고 한다.

[환구단과 정동 공간사②] 정치성과 이데올로기-대한제국기의 '권역 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