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구단 답사기

[환구단과 정동 공간사①] ‘환구단 권역’의 형성과 대한제국기 공간구조

인포쏙쏙+ 2025. 7. 25. 20:05

1️⃣ 정동, 대한제국의 전략 거점으로 떠오르다

대한제국 선포 전후,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에서 덕수궁으로 돌아와 정동 일대를 새로운 권력의 중심지로 삼았다. 이는 단순한 궁궐의 이동이 아니라, 외교·정치·종교 기능이 복합된 새로운 국가 운영 시스템의 공간 전략이었다. 정동 일대에는 러시아·영국·프랑스·미국 등 열강의 공사관이 밀집해 있었고, 고종은 이들과의 외교 교섭을 통해 일본의 압박을 견제하려 했다.

특히 1897년 환구단의 건립은 단순한 제사 공간 조성을 넘어, 천제(天祭)를 통한 하늘에의 자주 선언하는 상징적 행위였다. 정동과 환구단은 ‘국제 외교전의 최전선’과 ‘제국의 정당성 선언 공간’이라는 복합적 정치 공간을 갖추며 대한제국의 권위와 의지를 집약했다. 환구단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라, 고종의 정치 철학이 구체화한 상징 공간이었다. 국가 통치 체계의 전환과 자주독립을 표방한 장소로서, 제국의 정체성을 공간적으로 드러내는 대표적 사례였다.

[환구단과 정동 공간사①] ‘환구단 권역’의 형성과 대한제국기 공간구조


2️⃣ 환구단·덕수궁·중명전, 기능과 상징의 삼각구도

 

정동 중심부에 배치된 덕수궁, 환구단, 중명전은 각각 별도의 기능을 수행하면서도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덕수궁은 군주의 거처이자 대한제국 행정의 중심 공간이었고, 중명전은 고종이 외교 사절 및 고문들과 회동하는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이곳은 1905년 을사늑약 체결이라는 뼈아픈 역사의 현장으로도 기억된다. 중명전은 근대 외교의 전초기지였으며, 고종이 대한제국의 외교 주권을 수호하고자 치열하게 맞섰던 공간이기도 하다.

환구단은 그 중심에서, 고종이 황제의 자격으로 천제를 지내며 국가의 독립과 정통성을 하늘에 고하는 장소로 기능했다. 환구단에서의 제사는 단순한 전통 계승이 아니라, 서구 열강에 맞서는 동아시아식 통치 정당성의 천명이었다. 이는 청의 책봉 체제에서 벗어나 독립 황제임을 천제를 통해 상징적으로 선언한 것이며, ‘자주 황제국’으로서의 위상을 국내외에 공표한 정치적 행위였다.

이 삼각구도는 단순한 건축적 배치가 아닌, 대한제국이 구상한 ‘제국 공간’의 정치적·상징적 설계도였다. 세 공간은 물리적으로 인접하면서 기능적으로 연계되었고, 하루의 일정 안에서 고종이 이곳들을 순환하며 외교, 제례, 국정 행위를 수행했다는 점에서 하나의 ‘행위 공간 권역’으로 이해할 수 있다.


3️⃣ 정동의 교회와 학당들, 근대 시민 정체성의 출발점

 

정동 일대는 외교·정치 공간으로만 기능하지 않았다. 배재학당(1885), 이화학당(1886), 정동교회(1897) 등의 설립은 정동을 서구 문명과 기독교 윤리가 유입되는 창구로 만들었다. 이는 단순한 교육 기관이나 종교 시설을 넘어, 근대 시민사회의 기틀을 다지는 시도였다. 특히 이들 기관은 고종의 정치적 선택이자, 근대화 전략의 일환으로 자리 잡았다.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은 조선 청년들에게 서구 과학기술과 자유, 평등, 공동체 의식을 심어주는 장이었고, 정동교회는 고종이 기독교를 우호적으로 받아들여 통치 기반을 다지는 데 활용되었다. 기독교와 근대교육은 서구 세력과의 협력 기반을 형성하는 동시에, 새로운 국민 계몽의 토대를 마련했다.

이처럼 종교와 교육은 정치와 별개로 존재하지 않았으며, 대한제국의 ‘문명개화’ 전략에 포함된 영역이었다. 고종은 서양식 학교와 교회를 정동에 집중시켜, 이를 통해 근대국가로서의 정체성과 시민 기반을 형성하고자 했다. 이는 곧 정치권력과 문화 권력이 동일 공간 안에서 작동한 사례였다.

따라서 환구단이 과거 전통 질서 위에서 자주국의 정체성을 강화하려 했다면, 정동의 학당과 교회는 미래 지향적 질서를 만들어가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두 방향은 대한제국의 이중적 전략을 상징하며, 공간은 그 전략이 실현되는 구체적 무대였다.


4️⃣ 공간의 권역화: 환구단-정동을 하나로 읽는 방식

 

오늘날 환구단과 정동은 별개의 유적으로 분리되어 인식되지만, 대한제국기에는 이 두 공간이 정치·외교·제례가 통합된 하나의 국가 운영 권역으로 기능했다. 정동에서 이루어지는 외교 협상, 덕수궁에서의 국정 운영, 중명전에서의 회담, 환구단에서의 제례는 모두 하나의 흐름 위에 존재했다.

‘환구단 권역’이라는 개념은 도시 공간을 단순한 지리적 영역이 아닌, 정치적·역사적 의미가 통합된 기능 단위로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단일 유적지를 넘어서, 근대 국가 형성 과정에서의 공간 배치와 그 상징성을 통합적으로 해석할 필요가 있다. 정동과 환구단은 각기 다른 기능을 수행했지만, 하나의 공간 전략으로 묶이며 통합된 정치 무대로 작용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정동 일대 전체는 대한제국이 일본의 침탈에 맞서 국제 사회에 자주성을 천명하고, 국가 정체성을 재구성하려 했던 전략적 공간이자 인문지리적 복합체였다. 이 공간은 단지 정치의 배경이 아니라, 정치가 실제로 실현되고 기억과 권력이 서로 얽혀 축적된 장소였다.

이러한 공간 전략은 단지 대한제국기 한 시기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후 이어질 18편과 19편에서는 이 ‘환구단 권역’이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어떻게 해체되고 점유되었는지, 그리고 광복 이후에 어떤 방식으로 기억되고 복원되었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이를 통해 오늘날 우리가 환구단과 정동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에 대한 새로운 해석의 단서를 제공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