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광복 후 남겨진 공간들: 해방과 환구단의 침묵
1945년 8월 15일, 조선이 광복을 맞이한 이후 서울 도심 곳곳에는 여전히 일제강점기의 유산이 뚜렷하게 남아 있었다. 환구단과 조선신궁은 각각 대한제국의 출범과 일본 제국의 식민지 통치라는 상이한 정체성을 지닌 공간이었기에, 해방 이후 이들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는 단순한 공간 정비의 문제를 넘어 새로운 국가 정체성과 기억 체계를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에 대한 과제를 안겼다.
일제의 상징이었던 조선총독부 청사는 광복 후 미군정의 주요 행정기관으로 사용되면서 즉각적인 철거 없이 존치되었고, 그 외곽에 자리했던 제의 공간들 또한 빨리 역사적 위상을 회복하거나 재해석되지 못한 채 모호한 공백 상태로 남게 되었다.
환구단은 이미 일제강점기 동안 대부분의 원형이 훼손되거나 철거되었으며, 광복 이후에도 국가 차원의 복원이나 보존 조치 없이 서울 중심부의 잊힌 유적으로 방치되었다. 황궁우만이 유일하게 존치되었지만, 이는 단지 호텔 정원 한쪽에 위치한 구조물로 여겨졌고, 그 역사성과 상징성은 대중의 관심 밖에 머물렀다. 과거 대한제국의 출범과 자주성을 상징했던 이 제단이 독립 후에도 본격적으로 조명되지 못한 현실은, 해방 직후 한국 사회가 겪었던 정체성 혼란과 식민 잔재 청산의 어려움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반면, 조선신궁은 일제의 천황 숭배 이데올로기를 조선에 강제하기 위해 건립된 신사로, 해방과 함께 가장 강하게 부정된 식민 유산 중 하나였다. 신궁 본전, 참도, 계단 등 주요 구조물은 광복 직후 빠르게 철거되었고, 그 자리는 오랫동안 공터로 남게 된다. 그러나 이 공간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는 단순한 도시개발의 문제가 아니라, 일제가 남긴 정신적 통치의 상징을 어떻게 청산하고 국민적 기억을 재편할 것인가 하는 역사적·정치적 고민과 직결되었다.
조선신궁 터는 이후 한국 현대사 속에서 민족주의 기억과 식민 유산의 청산이 충돌하고 교차하는 대표적인 장소로 재편되게 시작했다.
2️⃣ 조선신궁 터와 안중근 의사의 기억: 공간의 전환
조선신궁이 있었던 남산 북측 자락, 즉 현재의 안중근의사기념관이 자리한 부지는 광복 이후 오랫동안 특별한 활용 없이 방치되어 있었다. 이곳은 일제강점기 동안 천황 숭배를 강요하기 위한 대표적 식민 통치 상징 공간으로, 많은 조선인이 국가 행사나 의무 참배 등을 통해 강제로 방문해야 했던 장소였다. 따라서 해방 이후 이 부지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는 단순한 도시계획을 넘어, 식민 기억을 어떤 방식으로 재편하고 새로운 국민 정체성을 구축할 것인가 하는 역사적 과제와 직결되었다.
이 공간의 전환은 1968년, 박정희 정부가 안중근 의사의 유업을 기리기 위해 기념관을 남산 자락에 세우겠다고 발표하면서 본격화되었고, 1970년 안중근의사기념관이 공식 개관하면서 구체적인 성과로 이어졌다. 이후 2010년에는 전면 재단장을 통해 전시물의 현대화와 공간 구성이 이뤄지며 시대 변화에 맞는 역사 교육 공간으로 거듭났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한 공간 활용이 아닌, 식민지 지배의 상징을 지우고 민족 저항의 기억으로 전환하려는 국가 주도의 기억 전략이었다. 조선신궁 터는 일제의 정신적 통치를 상징하던 장소에서 독립운동의 의미를 새롭게 부여받은 공간으로 변모했고, 이는 기억의 정치학이 현실에서 실현된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된다.
3️⃣ 환구단의 재조명과 서울 도심 속 역사 인식의 간극
1913년, 일제는 환구단의 원형 제단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조선총독부 산하의 조선호텔을 건립하였다. 이 조치는 단순한 도시 재개발이 아닌, 대한제국의 국가 의례와 자주적 상징 공간을 말살하려는 식민 통치 전략의 일환이었다. 이후 조선호텔은 광복 후에도 존속되었고, 민영화 과정을 거쳐 1960년대 후반부터는 오늘날의 웨스틴조선호텔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환구단 부지는 점차 역사적 장소로서의 의미를 상실해 갔으며, 일반 시민이 자유롭게 접근할 수 없는 민간 사유지로 전환되었다.
비록 황궁우가 남아 있었지만, 이는 호텔 정원 한 편의 단순 조경 시설처럼 인식되었고, 환구단이 지닌 정치적·문화사적 의미는 오랫동안 가려졌다. 환구단은 대한제국이 자주독립을 선언하며 천지신명에게 고하는 제를 올렸던 국가적 성소였음에도 불구하고, 서울 중심부에 위치하면서도 체계적인 복원이나 보존 정책 없이 대중의 관심에서 철저히 소외된 공간으로 전락한 것이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부 역사학자들과 시민단체들이 환구단의 역사적 가치를 복원하려는 노력을 시작했다. 특히 환구단이 대한제국 선포의 무대였으며, 근대 한국사에서 자주권을 상징하는 장소였다는 점에서 이 공간의 재조명은 단순한 유적 보존을 넘는 역사 인식의 회복이라는 차원에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조선신궁 터가 안중근 의사라는 뚜렷한 저항 서사를 통해 ‘기억의 장소’로 전환된 것과 달리, 환구단은 구체적 인물이나 사건과의 연결이 부족하다는 점에서 ‘콘텐츠 부재’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결과적으로 환구단은 여전히 역사적 상징성에 걸맞은 대우받지 못한 채, 서울 도심 한복판에 있으면서도 공공 기억 공간의 기능도 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단순히 물리적 공간의 활용 실패를 넘어, 한국 근대사에서 자주성에 대한 기억과 인식이 어떻게 제도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주변화되어 왔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이기도 하다.
4️⃣ 공공기억의 과제: 두 유산이 남긴 물음
조선신궁 터는 식민 통치의 상징에서 독립운동 기념 공간으로 성공적으로 전환되었지만, 환구단은 여전히 기억의 변두리에 머물러 있다. 이는 단지 두 공간의 활용 방식 차이를 넘어, 우리 사회가 기억과 정체성을 구성하는 방식의 차이를 드러낸다.
안중근 의사라는 상징적 인물에 기반한 조선신궁 터의 재구성은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지만, 환구단은 뚜렷한 인물 서사 없이 국가 제의의 장소로만 인식되면서 대중적 관심을 끄는 데 한계가 있었다. 또한 공간 자체가 지닌 역사적 가치만으로는 충분한 주목을 받기 어려웠다.
하지만 환구단 역시 대한제국의 건국과 자주권 선언이라는 중요한 순간을 품고 있는 장소다. 이 제단은 단지 과거의 유산이 아니라, 우리 근대사가 품고 있던 자주와 독립의 열망을 되돌아보게 하는 상징적 지점이다.
이제는 환구단을 단순한 유적이 아닌, 역사의 거울로 다시 바라봐야 한다. 우리가 어떤 과거를 기억하고 계승할 것인가는 곧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어떻게 그려나갈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환구단을 다시 찾는 발걸음은 한국 근대사 속 자주성 회복이라는 과제를 다시 새기는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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