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구단 답사기

[환구단과 조선신궁①] 제국과 식민의 제례 공간, 두 얼굴의 상징성

인포쏙쏙+ 2025. 7. 23. 15:41

1️⃣ 제국의례의 공간화: 환구단의 창건과 정치적 상징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조성된 환구단은 단순한 제사 장소를 넘어선 정치 상징이었다. 고종은 이곳에서 제왕이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전통을 계승한 환구제(圜丘祭, 또는 원구제)를 봉행했다. 이는 유교적 예제의 계승이자, 자주적 황제국으로서의 정치적 정당성을 천명한 행동이었다. 환구단은 단순히 하늘에 제를 올리는 공간이 아니라, 대한제국이 명실상부한 독립 제국임을 대내외에 알리는 정치 무대였다.

환구단 경내에는 상제를 모신 황궁우가 있고, 그 앞 원형 제단에서 황제가 제를 올렸다. 이 구조는 고대 중국의 천단을 모방한 형태로, 황제가 상제를 향해 직접 제를 올리는 형식을 취했다. 이는 천자의 자격을 갖춘 통치자로서 고종 자신을 상징화한 것이었다. 환구단은 단순한 종교 의례가 아닌, 정치적 퍼포먼스의 무대였으며, 대한제국의 자주 외교를 뒷받침하는 상징적 공간이었다.

특히 환구단에서 진행된 환구제는 당시 국제 정세 속에서의 외교적 전략이기도 했다. 청나라가 쇠락하고 러시아, 일본이 조선을 둘러싸고 세력 확장을 꾀하던 시점에서, 고종은 제국 의례를 통해 황제국으로의 전환을 선언한 것이다. 환구단은 '의례의 공간화'를 통해 정치적 정당성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수단이 되었으며, 서구 열강과의 외교전에서 자주국임을 증명하려는 상징적 장치였다. 하지만 이러한 상징성은 일본 제국의 침략이 본격화되며 급속히 희미해졌다. 1910년 국권이 상실되면서 환구단의 존재 역시 점차 역사 속으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환구단과 조선신궁①] 제국과 식민의 제례 공간, 두 얼굴의 상징성


2️⃣ 신사 체제의 도입: 조선신궁의 건립 목적과 기능

1910년 일제에 의해 조선이 강제로 병합되면서, 일본은 조선인의 정신과 사상을 통제하기 위해 국가신도를 조선에 이식하기 시작했다. 국가신도는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에서 형성된 체계이며, 일본 천황을 신격화하고 일본 고유의 신인 천조대신(天照大神)을 숭배하는 전통 신도를 국가 차원에서 체계화한 것으로, 단순한 종교를 넘어 천황 중심의 국가 질서를 정당화하는 정치 이데올로기였다. 이러한 체계는 일본 내 신민에게는 천황에 대한 절대적 충성을 강요하고, 식민지 국민에게는 황국신민화라는 이름 아래 일본 제국에의 복종을 요구하며 제국주의적 팽창을 정당화하는 역할을 했다.

조선신궁은 이러한 국가신도의 상징적 중심 역할을 하던 공간으로, 1925년 남산 중턱에 건립되었다. 이 신궁은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이자 조선 지배의 정신적 도구였다. 조선신궁은 단순한 종교시설이 아니었다. 이는 일본이 조선을 정신적으로 식민화하고자 했던 대표적 공간이며, 학생, 공무원, 일반인 모두에게 참배를 강요했다. 이를 거부한 자들은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고, 심한 경우 형사처벌로 이어지기도 했다.

조선신궁은 그 구조 자체로 일왕 중심의 세계관을 표현했으며, 조선인의 역사와 전통을 부정하고 새로운 질서를 주입하기 위한 상징적 수단이었다. 조선총독부는 환구단의 상징성을 무력화하기 위해 1913년 환구단의 제단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서양식 호텔을 건설했다. 이처럼 환구단이 상징하던 자주적 제국의 기억은 철저히 지워졌고, 대신 일본 천황을 신격화한 조선신궁이 조선인의 기억 속에 강제로 각인되었다. 이러한 공간의 전환은 단지 건축물의 교체가 아니라, 기억과 정체성의 지배 전략이었다.


3️⃣ 공간구조와 제의 체계의 비교: 환구단 vs 조선신궁

환구단과 조선신궁은 외형상 제사 공간이라는 공통점을 지니지만, 그 구조와 제의(祭儀, 제사의 의식과 절차) 방식, 상징 체계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환구단은 고대 동아시아 전통에 따라 원형 제단을 중심으로 삼문을 지나 제단으로 이르는 구성으로 설계되었다. 이는 하늘을 상징하는 원형과 우주적 조화를 나타내는 구조로, 유교적 세계관에 충실한 형태였다.

반면 조선신궁은 일본의 신사 건축 양식을 따랐다. 직선적으로 뻗은 참배로를 따라 신전으로 이어지는 구조였으며, 이는 일본의 국가신도 체계를 반영한 것이다. 제사의 대상도 뚜렷이 구분되었다. 환구단에서는 상제를 향해 도덕적 정당성과 통치의 정통성을 인정받는 의례를 행했지만, 조선신궁에서는 천황과 천조대신을 숭배하며 일본 제국에 대한 충성과 복종을 요구받았다.

환구단은 대한제국의 정통성을 강화하려는 공간이었지만, 조선신궁은 조선인의 역사와 전통을 부정하고 일본화된 세계관을 주입하려는 공간이었다. 두 공간은 단순히 건축 양식의 차이만이 아니라, 제의 방식과 지향하는 가치, 권력의 구조까지도 완전히 상반된 성격을 지녔다. 이를 통해 제의 공간이 단순한 종교 행위의 무대가 아닌,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표출 수단임을 확인할 수 있다.


4️⃣ 기억의 정치학: 두 공간의 역사적 운명과 의미

환구단은 대한제국의 자주성을 상징하던 공간이었지만, 조선총독부에 의해 그 상징이 철저히 말소되었다. 1913년 환구단이 철거된 이후 환구단 터에는 조선철도호텔이 들어섰고, 이는 전통 공간을 서양식 근대화라는 이름으로 지워버리는 상징적 조치였다. 이후 환구단은 오랫동안 서울 한복판에 존재하면서도 기억되지 못한 공간이 되었다.

반면 조선신궁은 해방 직후 일본인들에 의해 자진 폐쇄되었고, 비교적 이른 시기에 철거 절차가 진행되었다. 다른 지역의 신사들이 민중의 분노 속에 파괴되거나 방치된 데 반해, 조선신궁은 일제가 철수하기 직전 스스로 폐쇄 의식을 거행하고 해체를 시작한 사례로 기록된다. 그 자리는 이후 남산공원으로 조성되었고, 일제 지배의 상징에서 벗어난 공공의 공간으로 변화해 갔다.

이처럼 환구단은 강제 철거된 후 오랜 세월 방치되며 사람들의 기억에서 점차 사라진 반면, 조선신궁은 해방 직후 상징성의 무게로 인해 비교적 빠르게 정리되었고, 그 자리는 민족의 기억을 회복하는 기념 공간으로 전환되었다. 이러한 차이는 ‘기억’과 ‘망각’을 둘러싼 권력 작용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최근 들어 환구단은 대한제국의 유산이자 조선의 주권 회복 의지가 담긴 공간으로 재평가되고 있다. 반면 조선신궁은 일제의 지배 전략과 그 실패를 상기시키는 공간으로써, 기억 속에서 반면교사의 기능을 수행한다. 이러한 두 공간의 비교는 과거를 단지 회상하는 차원을 넘어, 현재 우리의 정체성과 가치관을 재정립하는 데 실질적인 통찰을 제공한다.

우리는 환구단과 조선신궁이라는 두 제의 공간을 통해, 역사란 권력에 의해 구성되기도 하고 잊히기도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환구단은 단순한 유적이 아닌, 주권과 정체성의 공간으로 다시 조명되어야 하며, 조선신궁은 과거의 억압을 잊지 않게 하는 교훈으로서 의미를 지닌다. 지금 우리가 어떤 공간을 기억하고 어떤 공간을 잊는가 하는 선택은, 곧 우리가 어떤 역사를 후세에 전하고 싶은가에 대한 답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