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 천둥과 함께 태어난 권위의 신
슬라브족의 대지 위에 울려 퍼지던 천둥은 단순한 자연현상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신의 분노이자 질서의 경고로 여겨졌습니다. 동유럽·중유럽 전역에 퍼져 있던 슬라브족은 기원후 6~7세기 무렵부터 오늘날의 우크라이나·폴란드·벨라루스·러시아 서부 일대에서 집단적 정착과 국가 형성을 시작했는데, 이 무렵에 등장한 것이 바로 '페룬(Perun)'입니다. 그는 하늘의 꼭대기에 앉아 번개와 폭풍, 전쟁과 맹세를 주관하는 신이었고, 슬라브 세계를 지배하는 최고신으로 숭배되었습니다.
페룬 숭배의 발생 시기는 이처럼 슬라브족의 국가적 정체성이 막 움트던 6~7세기경으로, 인도유럽계 천둥신 계열(게르만의 토르, 그리스의 제우스, 인도의 인드라)과 계보적으로 연결되지만, 슬라브인들은 이 신을 단순한 자연의 힘이 아닌 ‘질서를 부여하는 주권자’로 구체화했습니다. 페룬은 그저 하늘에서 번개를 던지는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법을 세우고 약속을 지키게 하며,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에게 천벌을 내리는 존재였습니다. 이처럼 자연신을 사회적 규율의 상징으로 끌어올린 시도가 바로 슬라브 제천의 출발점이었습니다.
2. 페룬의 세계관 — 하늘에서 질서를 내린 신
페룬은 늘 참나무 숲 위에 앉아, 불꽃을 품은 전차를 몰고 다니며 돌도끼와 불화살로 번개를 쏜다고 여겨졌습니다. 그가 움직일 때 천둥이 치고, 그의 무기가 땅에 떨어질 때 번개가 생긴다고 믿었습니다. 이 믿음은 슬라브 전역에서 유사하게 나타나며, 특히 키예프 루스 이전의 동슬라브 전통에서 확립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에게 바치는 제물은 주로 황소, 숫염소, 말 같은 힘센 가축이었고, 참나무 아래 불을 피우고 그 피를 뿌리며 맹세를 올렸습니다. 피와 불, 그리고 무기와 맹세가 하나의 묶음으로 작동한 셈입니다.
슬라브 신화에서 페룬은 지하의 뱀신 벨레스(Veles)와 끊임없이 싸우는 존재로 등장합니다. 벨레스는 지하·물·혼돈의 세계를 지배하며 인간의 가축을 훔치고 질서를 어지럽히는데, 페룬은 번개로 벨레스를 내리쳐 천둥을 일으킵니다. 겨울이 지나고 봄비가 내릴 때, 사람들은 그것을 페룬이 벨레스를 쫓아낸 증거로 여겼습니다. 이 신화는 단순한 전투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질서와 혼돈, 빛과 어둠의 순환을 해마다 재현하는 제천 의례의 세계관이었습니다.
주목할 점은 페룬이 단지 무력의 신이 아니라 법과 계약의 수호자였다는 점입니다. 슬라브 전사들은 전투를 앞두고 페룬에게 맹세했고, 그 맹세를 어긴 자는 신벌로 죽음을 맞이한다고 믿었습니다. 이는 인도유럽권의 다른 천둥신들이 주로 자연의 힘을 대표했던 것과 달리, 페룬이 사회 질서를 보증하는 최고 권위자로 발전했음을 보여줍니다.
3. 키예프 루스의 국가 제례 — 천둥으로 왕권을 봉인하다
페룬 숭배가 지역적 전통을 넘어 국가적 의례로 제도화된 순간은 10세기 키예프 루스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동슬라브 최초의 국가를 세운 키예프 대공 블라디미르 1세(재위 980~1015)는 수도 키예프의 언덕에 거대한 페룬 신상을 세우고 국가 제사를 실시했습니다. 『러시아 원초 연대기(Primary Chronicle)』에 따르면, 그는 페룬을 비롯한 여러 토착신의 신상을 나무와 금속으로 만들어 궁전 앞 언덕에 줄지어 세웠고, 귀족들과 함께 제물을 바쳤습니다.
당시 페룬 신상 앞에서는 황소·말·닭 등의 제물이 도살되어 참나무 불에 태워졌고, 전사 집단은 그 피 앞에서 무기를 들어 맹세했습니다. 불·피·무기·맹세가 결합된 이 의식은 단순한 종교 행위가 아니었습니다. 블라디미르는 자신이 페룬으로부터 통치권을 위임받았음을 공개적으로 선포했고, 모든 귀족과 전사 집단은 그 질서를 받아들이는 맹세를 올렸습니다. 페룬 제천은 국가 권력의 상징이자 왕권 봉인식의 기능을 했던 것입니다.
이 제례에는 북방 바이킹계 바랑기안(Varangians) 전통이 깊숙이 섞여 있었습니다. 당시 루스 귀족층은 노르드 출신이 많았고, 그들은 무기 봉헌과 전리품 매장, 집단 연회로 결속을 다졌습니다. 이 바이킹식 희생제 전통이 페룬 숭배에 결합해 유사한 형태의 국가 제사가 형성되었습니다. 국가적 전쟁과 정복이 곧 페룬의 이름으로 신성화되었고, 페룬은 인간의 군주를 넘어 국가를 세우는 초월적 주권자의 위치에 올랐습니다.
4. 기독교화 이후의 금지와 잔존
그러나 페룬의 전성기는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블라디미르 1세는 988년 비잔틴과의 동맹을 굳히며 세례를 받고 정교회 기독교를 키예프 루스의 공적 신앙으로 채택했습니다. 『원초 연대기』가 전하듯, 그는 키예프 언덕의 페룬 신상을 끌어내려 드네프르 강에 던지고, 도성의 토착 신상과 제단들을 파괴했습니다. 이에 따라 페룬 제례는 공식적으로 금지되었고, 제의를 주관하던 지역의 제의 담당층(사제적 역할·유력자)도 영향력을 잃었습니다.
그럼에도 민중의 기억 속 페룬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천둥이 치면 도끼나 낫을 십자 형태로 세워 번개를 막고, 벼락 맞은 참나무를 성목으로 삼는 풍습이 이어졌습니다. 7월 20일 전후(정교회 달력의 성 엘리야 축일과 겹침)에는 비를 부르거나 불을 피우는 민속 의례가 남았고, 결혼식·맹세식에서도 천둥을 증인으로 삼는 주문이 오래도록 암송되었습니다. 이는 제천이 금지된 뒤에도 페룬의 상징체계가 민간의 생활 의례로 흡수되어 잔존했음을 보여 줍니다.
오늘날 동유럽 일부 지역에서는 ‘페룬의 날’(День Перуна, Den’ Peruna)이라는 이름으로 전통 축제를 재현하는 사례가 있으며, 슬라브 신화를 바탕으로 한 민속 문화·관광 프로그램에도 페룬의 천둥·맹세 상징이 활발히 활용됩니다. 신전은 사라졌지만, 천둥과 맹세의 표상은 여전히 지역 문화유산 속에서 살아 있습니다.
5. 결론 및 나의 의견 — 천둥에서 법으로, 신에서 제도로
페룬 숭배는 단순한 자연 숭배의 전통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천둥과 폭풍이라는 두려운 힘을 ‘질서를 세우는 권위’로 바꾸려 한, 슬라브 세계만의 독창적인 실험이었습니다. 처음에 그는 하늘에서 번개를 던지는 자연신이었지만, 곧 전사들의 맹세를 보증하고 왕권을 봉인하며 국가 질서를 관장하는 법의 신으로 변모했습니다. 이는 유럽의 다른 제천문화와 비교해도 매우 독특한 변화였습니다.
노르드의 블로트가 공동체 결속에, 발트의 사울레 숭배가 생명의 재생에 초점을 맞췄다면, 페룬 숭배는 처음부터 끝까지 권력과 법의 정당화에 초점을 맞춘 제천이었습니다. 그만큼 국가적 제도로서 기능했고, 그렇기에 기독교화와 함께 가장 강력하게 억압받았던 것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 지점이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현대 사회에서 법과 권력은 여전히 위로부터 부여된 것으로 여겨지곤 합니다. 하지만 페룬 숭배의 전통을 돌아보면, 그 권위는 사실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공동체가 두려움을 극복하고 질서를 세우기 위해 집단적으로 구성해 낸 신화적 계약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약 천 년 전 키예프 언덕 위에서 울려 퍼지던 천둥의 제전은 이렇게 묻습니다.
“우리는 어떤 힘에 복종하며, 그 힘이 누구의 동의 위에 서 있는가.”
저는 이 오래된 질문이야말로 오늘날 우리가 제천문화를 연구하고 기억해야 하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페룬의 천둥은 단순한 자연의 소리가 아니라, 인간이 질서를 만들기 위해 하늘에서 끌어내린 첫 번째 법이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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