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왜 베트남은 ‘시조’를 제사하는가?
세계의 제례 문화를 살펴보면 대부분은 태양, 달, 하늘, 바람과 같은 자연신을 향한 의식으로 발전해 왔습니다. 그러나 베트남의 대표적 제례 전통은 이와는 다소 다른 길을 걷습니다. 바로 훙왕(雄王) 기념제입니다. 베트남의 건국 시조로 전해지는 훙왕을 기리는 이 제례는 단순히 ‘종교적 제사’라기보다, 민족의 뿌리를 확인하고 공동체의 결속을 다지는 국가적 의례입니다.
한국의 개천절이 단군 신화를 바탕으로 민족의 기원을 기념하는 날이라면, 베트남의 훙왕 기념일(Giỗ Tổ Hùng Vương, 음력 3월 10일)은 시조 왕조의 존재를 확인하고 그 유산을 계승한다는 점에서 유사한 성격을 지닙니다. 그러나 두 전통은 ‘하늘’과 ‘조상’을 매개로 국가 정체성을 다진다는 점에서 서로 닮았으면서도, 역사적 배경과 문화적 맥락에서는 뚜렷한 차이를 드러냅니다.
그렇다면, 베트남은 왜 하늘과 조상을 함께 엮은 ‘시조 제사’라는 독특한 형태의 제천 문화를 발전시켰을까요? 또 그것은 어떤 역사적 과정을 통해 국가적 의례로 자리 잡았을까요?
1. 홍방 건국 신화 – 용과 선녀의 후손, 훙왕
베트남의 훙왕 신앙은 홍방(雄邦) 왕조라는 전설적 기원 서사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대월사기전서(大越史記全書)』와 구전 전승에 따르면, 베트남 민족의 조상으로 여겨지는 '락롱꿔군(Lạc Long Quân, 낙룡군)'은 용왕의 아들이었고,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인 어우꺼(Âu Cơ)와 결합해 백 개의 알을 낳았습니다. 그 알에서 태어난 100명의 자식 가운데 장남이 바로 훙왕으로, 그는 기원전 2879년경 반랑국(文郞國)을 세운 시조로 전해집니다.
물론 이 연대와 서사는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 신화적 상징입니다. 실제 고고학 연구에 따르면, 홍강(紅河) 유역에서는 기원전 약 1000년부터 기원전 1세기 사이에 이르는 시기에 동선(Đông Sơn) 문화가 번성했습니다. 이 문화에서는 청동 무기와 함께 '동손북(Đông Sơn drums)'이라는 정교한 청동 북이 발견되었는데, 북 표면에 새겨진 태양 문양, 전사와 새, 배, 춤추는 인물상 등은 제천 의례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즉, ‘훙왕이 세운 반랑국’이라는 전설은 고고학적 사실과 직접적으로 일치하지는 않지만, 베트남 지역에서 실제로 진행된 청동기 시대 집단 제례와 권력 형성의 경험을 반영한 상징적 이야기로 볼 수 있습니다.
2. 동선 문화와 집단 제례 – 북소리로 하늘을 부르다
베트남의 동선 문화는 동남아시아 청동기 문명의 정점으로 평가됩니다(약 기원전 1000년~기원전 100년경). 이 시기의 가장 대표적인 유물이 바로 동손북입니다. 이 북은 단순한 악기가 아니라, 공동체 전체가 하늘과 교감하는 매개체였습니다.
북 표면에는 태양을 상징하는 방사형 문양이 중심에 새겨져 있는데, 이는 농경 주기와 직결된 하늘의 질서를 상징합니다.
북 주변에는 새들이 날아가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는데, 이는 샤먼이 새처럼 하늘을 오가며 신과 교류한다는 믿음을 반영합니다.
북을 두드리는 행위는 단순한 음악이 아니라 하늘에 울려 퍼지는 집단적 기도였습니다.
또한 동선 문화의 매장지에서 발견된 제물, 동물 뼈, 청동기 유물들은 공동체가 주기적으로 모여 의례를 치렀음을 보여줍니다. 이는 단순한 생존 기술을 넘어, 사회적 결속과 위계질서를 만들어가는 과정이었습니다.
비슷한 시기의 메소포타미아 아키투 축제가 왕권의 재확인 의식이었다면, 동선 문화의 제례는 민족 시조의 기억과 공동체적 연대를 강조하는 장치였습니다. 하늘과 태양에 대한 숭배가 ‘우리의 뿌리’라는 신화와 결합하면서, 베트남 사회만의 독창적 제례 세계가 형성된 것입니다.
3. 국가적 제도로서의 훙왕 제사 – 전설에서 제도로
시간이 흐르며 훙왕 숭배는 단순한 신화적 전승을 넘어 국가 제례 제도로 자리 잡았습니다. 중국의 『사기』, 『후한서』와 베트남의 『대월사기전서』 기록에 따르면, 고대 베트남의 반랑·Âu Lạc 시대 이후에도 훙왕은 ‘민족의 시조’로 기억되었고, 후대 왕조가 자신의 정통성을 정당화하는 데 활용했습니다.
특히 리 왕조(李朝, 11~13세기)와 레 왕조(15~18세기) 시기에는 훙왕 사당(Đền Hùng)이 지속적으로 중수되었고, 왕이 직접 제사를 주관하거나 국가가 공식적으로 제향을 올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훙왕 제사는 단순히 지역 신앙이 아니라, 베트남 국가의 정체성과 독립을 확인하는 의례로 발전했습니다.
이는 고대 히타이트 폭풍신 제례가 정복지 신들을 통합하며 제국적 권위를 드러낸 것과 대비됩니다. 베트남의 훙왕 제사는 영토적·민족적 기원을 강조하여 '우리는 중국과 다른 고유한 뿌리를 가진 민족'이라는 점을 반복적으로 선포했습니다. 이처럼 제례는 권력을 강화하는 수단이자, 외부의 압력 속에서 자주성을 지켜내는 정치적 언어였습니다.
4. 오늘날의 훙왕 기념일 – 살아 있는 민족 제례
훙왕 제례의 가장 큰 특징은 현대까지 국가적 공휴일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베트남 정부는 2007년부터 음력 3월 10일을 ‘훙왕 기념일’로 지정했고, 이후 2012년에는 ‘훙왕 숭배에 관한 제례와 축제’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 목록에 등재되었습니다. 이는 세계적으로도 드문, 신화적 시조 제례가 오늘날까지 살아남아 국제적 인정을 받은 사례입니다.
매년 이 날이 되면, 베트남 전역에서 사람들이 조상 제사와 함께 시조 숭배에 참여합니다. 수도 하노이 북쪽의 푸토(Phú Thọ) 성에 있는 흥 사원(Đền Hùng)에서는 국가 차원의 공식 기념식이 거행되며, 최고 지도자가 직접 분향하고 국민적 통합을 상징하는 의례를 집전합니다.
또한 수많은 일반 시민과 불교 승려, 해외에 거주하는 교포들이 이곳을 찾아 코라와 유사한 순례 행렬을 이루고, 전통 악기 연주·사자춤·민속놀이·전통 음식 제사 등이 함께 진행됩니다. 이는 단순한 제례가 아니라, 문화 축제와 국가 의식이 결합한 형태로서, 고대 제천 전통이 어떻게 현대 국가의 기념일로 재탄생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5. 결론과 나의 의견 – ‘기억의 정치’와 아시아 제천의 시사점
베트남의 훙왕 기념제는 인류 제천 문화에서 보기 드문 사례입니다. 대부분의 고대 제천이 초월적 존재, 즉 하늘·태양·자연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던 것과 달리, 베트남은 구체적 인물을 ‘시조’로 신격화하여 제천 의례에 결합시켰습니다. 다시 말해, 하늘 숭배가 공동체를 우주적 질서에 묶는 방식이라면, 훙왕 제사는 조상 신화를 통해 민족의 기원을 정치적으로 제도화한 의례였습니다.
저는 여기서 두 가지 중요한 통찰을 얻습니다. 첫째, 제례는 단순히 신을 향한 종교적 의무가 아니라, 공동체가 스스로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언어라는 점입니다. 메소포타미아 아키투가 '왕과 신의 계약'을, 수메르 지구라트가 '하늘과 인간의 연결'을, 이집트 태양 제례가 '사후의 영속성'을 강조했다면, 훙왕 제사는 ‘우리는 누구의 자손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집단적 대답을 국가 의례로 만든 독특한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
둘째, 훙왕 기념제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국가적 공휴일로 이어진다는 점은, 제례가 단절되지 않고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필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는 단군을 기리는 개천절과 비교해도 흥미로운 지점을 드러냅니다. 한국과 베트남 모두 신화적 시조를 통해 국가 정체성을 확인하지만, 베트남은 매년 제사를 직접 지내며 ‘조상 숭배’를 공동체 결속의 실질적 행위로 유지하고 있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결국 훙왕 기념제는 기억의 정치를 구현하는 의례입니다. 어떤 신화를 기억하고, 어떻게 제도화할 것인가에 따라 공동체의 정체성이 달라집니다. 고대 선조들이 신화적 시조를 기리며 하늘과 이어지려 했듯, 오늘의 베트남도 그 기억을 다시 불러와 현대 국가 정체성의 기둥으로 삼고 있습니다.
오늘날 전 세계가 직면한 정체성의 혼란과 공동체의 분열 속에서, 베트남의 훙왕 기념제는 한 가지 메시지를 던집니다. '과거를 기억하는 일은 단순한 향수가 아니라, 현재를 지탱하고 미래를 설계하는 정치적 실천이다.' 저는 이 시사점이 환구단을 비롯한 다른 아시아 제천 전통을 이해할 때도 중요한 비교 지점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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