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국 선포, 외신과 외교기관의 첫 반응
1897년 10월 12일, 고종은 환구단에서 제천의례를 거행하고 대한제국의 황제로 즉위함으로써, 새로운 국가체제의 탄생을 대내외에 공표했다. 이는 단지 국호와 연호를 바꾸는 수준을 넘는 정치적 선포였으며, 당대 세계 각국의 언론과 외교기관도 이에 주목했다.
고종의 제천의례 직후 대한제국의 수립은 『The Independent』, 『The Korean Repository』, 『The New York Times』와 같은 당대 외신을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보도되었다. 특히 서울 주재 외국인 거주자와 선교사들이 주필로 참여하던 『The Korean Repository』는 황제 즉위와 관련된 국내외 반응을 상세히 기록했으며, 고종의 정치적 결단을 '조선의 주권적 의지의 표현'으로 보도했다.
또한 대한제국 선포에 대해 외국 공사관들은 조심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미국과 영국 등 서방 열강은 이를 형식상의 변화로 간주하면서도, 조선의 독립적 외교정책 전환 가능성에 예의주시하였다. 러시아는 초기에는 냉담한 반응이었지만 기존의 우호적 외교 관계를 강조하며 고종의 황제 즉위를 긍정적으로 해석했다. 이는 1896년 아관파천 이후 형성된 러시아-조선 관계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다.
당시 일본은 대한제국의 출현을 공식적으로 문제 삼지는 않았지만, 내심 경계하는 분위기를 보였다. 일본은 고종의 제국 선포를 러시아의 배후 조종으로 간주하였으며, 조선의 자주성보다는 러시아의 영향력 확대를 우려하였다. 일본 외무성은 이를 "실질적 독립이 아닌 외세의 포장된 자주성"으로 평가하였고, 이후 대한제국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위한 전략적 접근을 모색하게 된다.
중국(청나라)은 1895년 시모노세키조약을 통해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포기한 상태였기에 공식적인 외교 반응을 내지 않았다. 그러나 내심으로는 고종의 황제 즉위를 탐탁지 않게 여겼으며, 외교적 무시 전략을 통해 조선과의 관계에서 거리를 두었다. 이는 청이 더 이상 조선 문제에 직접 개입할 명분도 여력도 없었음을 보여준다.
2️⃣ 독립신문, 제국 선포를 국제사회에 알리다
독립신문은 서재필이 1896년 창간한 조선 최초의 한글 신문이자, 영문판을 병행 발간한 독립협회의 기관지 성격을 지닌 언론이었다. 이 신문은 대한제국 선포 이전부터 "조선은 자주국이다"라는 표현을 반복적으로 사용하며, 자주독립의 담론을 국제사회에 전달하려 애썼다.
독립신문은 1897년 10월 환구단 제례와 대한제국 선포를 상세히 보도하면서, 고종의 황제 즉위를 ‘조선의 자주적 주권 회복’과 ‘국가 위상 강화’의 중요한 정치적 사건으로 평가했다. 신문은 이 제례가 단순한 전통 재현에 그치지 않고, 청나라와의 종속적 관계를 공식적으로 끊고 새로운 국가 체제로의 전환을 상징한다고 보도하였다. 특히 ‘대한제국’이라는 국호와 황제 칭호 채택이 외국 열강과의 대등한 외교 관계 수립 의지를 내포하고 있음을 강조하며, 국민에게도 자주국으로서의 자긍심을 고취시키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이러한 보도는 독립신문 영문판(The Independent)으로 미국·영국을 포함한 외국 공사관과 선교사 집단에 배포되었으며, 조선 정부의 독립 의지를 국제사회에 직접 전달하는 창구로 기능하였다. 독립협회 인사들 역시 ‘자주국’의 의미를 단지 열강으로부터의 간섭을 막는 소극적 개념이 아닌, 자발적 정치 주체로서의 선언으로 보았고, 『The Independent』는 그 목소리를 국제적으로 중계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3️⃣ 열강은 제국 선포를 어떻게 해석했는가?
당대 외국인 선교사 및 외교관들의 시선이 반영된 『The Korean Repository』는 대한제국 선포 직후 1897년 11월호에서 관련 소식을 상세히 다루었다. 이 잡지는 고종이 황제를 자처함으로써 청과의 종속적 관계를 공식적으로 단절했다는 의미를 담아 보도하였다.
그러나 『The Korean Repository』의 논조는 다소 냉소적이었다. 많은 외국인 필자는 고종의 제국 선포를 ‘형식적 독립’에 불과하다고 보았고, 실제 조선의 내정은 여전히 열강의 간섭에 취약하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특히 일본의 영향력 확대와 러시아의 명분상 우호적인 개입이 혼재하는 가운데, 대한제국의 실질적 자주성은 의문시된다는 논평도 이어졌다.
미국 국무부의 외교문서에는 고종의 제국 즉위와 관련된 보고가 일부 존재하나, 이를 동아시아 외교 질서 변화의 결정적 변수로 해석한 명시적 언급은 드물며, 간접적 표현만이 존재할 뿐이다.
4️⃣ 미국·영국 언론은 왜 ‘제국 선포’를 전략으로 봤는가?
고종의 대한제국 선포는 단순한 호칭 변경이 아니라, 외교 전략의 일환이었다는 점을 서방 언론은 일찍이 간파했다. 뉴욕타임스는 1897년 10월 중순 보도에서 고종의 제국 선포를 외세로부터 독립하려는 시도로 평가했다.
이는 영국에서도 유사하게 보도되었는데, 대한제국 선포를 외교적 독립 의지의 표현으로 해석하였다.
이러한 언론 보도는 당시 동아시아 외교 무대에서 ‘칭호의 정치’가 갖는 의미를 인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서방 언론은 제국 선포를 통해 고종이 단순히 국내 정권 강화를 넘어서 국제사회 내에서 조선의 지위를 재정립하려 했다고 분석하였다. 이 점에서 환구단 제례는 국내 정치와 국제 외교를 연결하는 ‘의례 외교’의 핵심 사례였다.
결국, 대한제국 선포는 조선이 단순한 왕국에서 벗어나 국제 질서 속 자주적 주체임을 선언한 사건이었으며, 이를 가능케 한 공간이 바로 환구단이었다. 환구단은 더 이상 단지 전통 제례의 장소가 아니라, 국제정치의 최전선에서 사용된 상징적 공간이었다. 이는 ‘환구단 답사기’ 시리즈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메시지로, 공간을 통한 역사 읽기의 실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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