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황제 즉위’의 꿈은 언제 시작되었는가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한 1897년은 조선의 역사에서 가장 중대한 정치적 전환점 중 하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제국 선언’은 하루아침에 결정된 것이 아니었다. 그 배경에는 조선 후기의 왕권 약화, 국제 정세의 격동, 그리고 고종 개인의 정치적 이상과 고뇌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고종은 이미 임오군란(1882)과 갑신정변(1884), 갑오개혁(1894~1895) 등을 거치며 외세의 간섭 속에서 왕권의 지속을 고민해 왔다. 특히 1895년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에 의해 시해되는 ‘을미사변’ 이후, 고종은 일본에 대한 극도의 불신과 공포를 갖게 되었고, 이는 왕권 강화를 통한 체제 수호의 강한 동기로 작용하였다.
1896년 아관파천으로 러시아 공사관에 머문 고종은 국제 정세의 격동을 보다 직접적으로 체감하게 되었고, 이 시기부터 ‘조선국’을 넘어선 새로운 국가 체제에 대한 구상을 본격화한 것으로 보인다. 단순한 국호 변경이 아닌, 조선의 국체를 ‘왕국’에서 ‘제국’으로 격상시키고자 한 고종의 의도는 점차 구체화되었으며, ‘황제’라는 칭호는 외교 질서 속 자주권 확보와 내정 권위 강화를 함께 겨냥한 중대한 정치적 선택이었다.
2️⃣ 청일전쟁 이후 조선의 외교 지형 변화
대한제국 선포의 외적 동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1894~1895년 청일전쟁 이후 급변한 동아시아 국제 질서를 이해해야 한다. 이 전쟁에서 청이 패배하면서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포기하게 되었고, 그 결과 조선은 조약상 독립했으나 실질 외교권은 제약되었던 명목상의 독립국이 되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일본, 러시아, 청, 영국, 프랑스 등의 열강들이 조선을 중심으로 치열한 영향력 경쟁을 벌이는 ‘세력 각축지’로 변모했다.
특히 1895년 삼국간섭(러시아, 독일, 프랑스가 일본의 랴오둥반도 점령을 저지한 사건) 이후 러시아는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했고, 일본은 이에 맞서 다시 군사·경제적 침투를 가속화하였다. 조선은 이러한 틈바구니에서 생존 전략을 모색해야 했고, 고종은 중립 외교를 표방하는 동시에, 자주국임을 천명하며 열강 간 세력 균형 외교를 구사하려 했다.
그러나 당시 국제법상 조선은 여전히 명확한 ‘주권 국가’로 인정받지 못했고, 열강은 조선을 실질적 보호국 내지 영향권 국가로 취급했다. 이런 상황에서 고종은 단순한 ‘조선 국왕’으로서는 국제적 위상 제고가 어렵다는 현실을 자각하게 되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제국 선포’는 조선이 더 이상 중국의 속국도, 일본의 보호국도 아니라는 상징적 선언이자 외교 전략을 일환으로 기획되었다.
3️⃣ 독립협회와 ‘자주국’ 담론의 확산
대한제국 선포를 뒷받침한 내부 동력 중 하나는 1896년 창립된 ‘독립협회’의 활동이었다. 서재필, 이상재, 윤치호 등의 지식인들이 주도한 독립협회는 『독립신문』을 통해 ‘자주국 조선’과 ‘입헌 군주제’의 이상을 널리 전파했다. 특히 그들은 조선이 외세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왕권과 국민의 역할이 조화를 이루는 새로운 정치 체제를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독립신문』은 대한제국 선포 직전까지 “우리나라는 자주국이다”라는 표현을 반복하며, 국민에게 외세의 간섭에서 벗어난 독립국으로서의 자각을 고취하였다. 독립협회의 활동은 ‘자주국 체제’에 대한 여론 형성에 기여했고, 고종은 독립협회 등에서 주장되던 ‘자주국’ 담론을 받아들이면서도,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권력 중심 체제를 강화하는 정치적 결정이었다.
1897년 10월 환구단에서 고종이 제천의례를 행하고 대한제국 선포를 공식화할 당시, 이는 단지 ‘칭호의 변화’가 아니라 정체성의 전환을 상징하는 의례였다. 고종은 환구단에서의 제천의례를 통해 ‘조선 국왕’이 아닌 ‘대한제국 황제’로서의 지위를 선포했고, 이는 종래의 ‘조선인’ 정체성에서 벗어나 ‘대한제국의 백성’이라는 새로운 국민 정체성을 형성하려는 상징적 시도였다. 환구단이라는 의례 공간은 이러한 전환을 물리적, 시각적으로 전달하는 공간이었다.
4️⃣ 환구단 제례와 국호 ‘대한제국’의 공식화
1897년 10월 12일, 고종은 환구단에서 제천의식을 거행하고 대한제국 황제에 즉위하였다. 이 의례는 고대 중국과 조선의 제례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새 시대를 상징하는 정치적 선언으로서의 기능을 지녔다.
왕이 종묘와 사직에 제사를 지내지만, 황제는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권위를 지니며, 고종이 환구단에서 즉위를 천명한 것은 유교적 질서 체계 속에서 ‘천명’의 정통성을 바탕으로 한 중대한 정치 행위였다.
이날 선포된 국호 ‘대한제국’은 조선이라는 국명을 넘어서, 독립 국가 체제를 공식화한 상징이었다. ‘대한(大韓)’은 삼한 전통에 뿌리를 둔 민족 명칭으로, 고종은 이를 통해 중국 중심 질서에서 벗어나 ‘자주적 제국’을 자처하였다.
선포 직후 연호 ‘광무’가 사용되었고, 관제 및 외교 문서가 새 체제에 맞게 개편되는 등 단순한 명칭 변경을 넘어선 체제 재설계가 진행되었다.
환구단은 단순한 제단이 아니라 고종의 정치적 의지가 구체화한 공간이었으며, 그곳에서 진행된 제례는 유교적 정통성, 민족적 자주성, 국제적 독립 의지를 모두 담아낸 복합적 메시지였다. 이는 ‘환구단 답사기’ 시리즈 전편을 관통하는 중심축이자, 고종의 정치 구상을 이해하는 핵심 열쇠이다.
'환구단 답사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환구단, 세계를 향한 제국의 언어 (2) | 2025.08.01 |
---|---|
[환구단과 정동 공간사⑦] 정동의 길, 제국의 질서 (8) | 2025.07.31 |
[환구단과 정동 공간사⑥] 종교·교육계 인물과 사건 (10) | 2025.07.30 |
[환구단과 정동 공간사⑤] 정치·외교 분야의 잊힌 인물들 (11) | 2025.07.29 |
[환구단과 정동 공간사④] 현대적 재해석과 도시재생 과제 (8) | 2025.07.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