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폭풍신과 히타이트의 신앙 세계 – ‘천 개의 신들을 모신 제국’
히타이트 제국(기원전 약 17세기부터 12세기경)은 아나톨리아 중부(오늘날 터키 중부)를 중심으로, 시리아와 북메소포타미아, 에게 해 연안까지 세력을 넓힌 고대 근동의 강대국이었습니다. 척박한 고원 지대와 불규칙한 기후 속에서 살아가던 히타이트인들에게 하늘의 비와 천둥은 생존을 좌우하는 결정적 요소였습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비와 폭풍을 주관하는 신이 신들 가운데 가장 높은 권위를 차지하게 되었고, 그가 바로 폭풍신 '타르훈나(Tarḫunna)'였습니다.
그러나 히타이트의 종교는 한 신만을 절대적으로 섬기는 체계가 아니었습니다. 정복과 교류를 거듭한 결과, 그들은 각 지역의 신들을 자신의 신앙 체계 속에 받아들였습니다. 이 때문에 히타이트는 고대 문헌에서 종종 '천 개의 신들의 나라'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각 지방의 신은 이름과 성격을 유지한 채 제국의 신앙 체계에 편입되었고, 왕실은 이들을 공식적으로 관리하면서 통합의 상징으로 삼았습니다.
이 복잡한 신들의 세계 가운데 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존재가 폭풍신이었습니다. 히타이트 본래의 전통에서 숭배된 타르훈나는, 제국이 후르리 지역을 지배하면서 그곳의 폭풍신 '테슈브(Teššub)'와 점차 동일시·융합되었습니다. 그리고 기원전 13세기 전성기와 제국 말기에 이르면, 테슈브의 성격이 강하게 드러난 궁정 종교가 형성됩니다. 이때 테슈브의 배우자인 헵파트(Hepat)—후르리 전통의 ‘하늘의 여왕’이자 모신(母神)—역시 왕실 숭배에서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게 됩니다.
이렇듯 히타이트의 제례 전통은 정복한 신들을 흡수해 하나의 질서로 묶는 포용성과, 그 정점에 폭풍신을 두어 국가 권위를 신과 연결하는 구조가 결합되어 있었습니다. 이는 메소포타미아처럼 한 도시의 수호신이 중심이 되는 체계나, 이집트처럼 파라오 자체가 신으로 추앙된 체계와는 다른 길을 보여줍니다. 히타이트는 여러 신을 인정하면서도, 특정 신을 통해 제국적 중심을 만들어낸 독창적 종교 정치 질서를 구축했던 것입니다.
2. 히타이트 야즐르카야 성소 – 폭풍신 제례의 무대
히타이트 폭풍신 제례의 독창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장소는 수도 하투사에서 북동쪽으로 약 2km 떨어진 야즐르카야(Yazılıkaya) 바위 성소입니다. 이곳은 이미 구왕국 시기부터 신성한 공간으로 사용되었으나, 우리가 오늘날 보는 웅장한 신들의 부조는 기원전 13세기, 투두할리야 4세와 수필룰리우마 2세 시기에 집중적으로 조성되어 사실상 완성된 형태를 띠게 되었습니다.
히타이트 왕들이 왜 굳이 수도 성곽 안이 아닌 외곽의 협곡을 성소로 삼았을까요? 첫째, 자연 경계의 상징성 때문입니다. 야즐르카야는 석회암 절벽이 둘러싼 독특한 지형으로, 고대인들에게는 하늘·땅·지하가 맞닿는 ‘경계 공간’으로 여겨졌습니다. 이는 제례가 단순한 도시 신전의 반복 의식이 아니라, 우주적 차원의 질서를 갱신하는 특별한 의례임을 보여줍니다.
둘째, 정치적 상황이 이 공간 선택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기원전 13세기 말, 히타이트 제국은 ‘바다 민족’의 침입과 내부 권력 투쟁으로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왕권은 신들의 총회가 열리는 상징적 공간을 통해, ‘제국은 여전히 신의 보호 아래 있다’는 메시지를 백성과 귀족에게 각인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바위에 새겨진 신들의 대행렬은 불안정한 현실 속에서 변치 않는 신적 질서의 영속성을 선포하는 일종의 정치적 선언이었습니다.
셋째, 우주론적 의미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야즐르카야의 두 개의 방—밝은 A실과 어두운 B실—은 천상과 지하, 생명과 죽음, 질서와 혼돈의 이중성을 시각적으로 보여줍니다. 특히 A실의 12신 행렬은 계절의 순환이나 12개월과 연결된 것으로 해석되며, 제국이 시간의 질서까지도 신의 의지에 따라 관리된다는 의미를 담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는 학자들 사이의 해석 차이가 존재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공간이 단순한 제단을 넘어 ‘우주적 시간과 권력’을 새기는 상징적 무대였다는 점입니다.
결국 야즐르카야는 제례의 순간을 흘려보내지 않고, 돌에 각인된 영원한 신들의 집회로 남겨 제국의 정치·종교적 비전을 후대에 전하려 했던 장소였습니다.
3. 바위 부조 속 신들의 행렬 – 히타이트 신앙의 통합과 질서
야즐르카야에는 90여 명의 신들이 부조로 새겨져 있습니다. 이 신들은 줄지어 대열을 이루며 양쪽에서 행진해 가운데서 폭풍신 테슈브와 하늘의 여왕 헵파트 부부를 향합니다. 그 장면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히타이트 다신교의 핵심 구조를 시각화한 것이었습니다.
이 장면의 차별성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정복한 지역의 신까지 통합했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시리아 지역에서 받아들인 신, 메소포타미아적 신 요소까지 히타이트의 판테온에 포함되었습니다. 이는 단순한 제례가 아니라, 제국 통합 정책의 종교적 표현이었습니다. 전쟁으로 정복한 땅의 신을 제국 신전으로 옮겨오고, 야즐르카야 부조 속에 함께 새김으로써 '히타이트는 모든 신의 질서를 지배한다'는 정치적 선포를 새긴 셈입니다.
둘째, 신들의 질서를 시간·공간적으로 배열했다는 점입니다. 일부 학자는 야즐르카야를 단순한 제단이 아니라 일부 학자들이 ‘달력형 성소(calendar sanctuary)’라고 해석합니다. 즉, 신들의 배열이 태양 주기나 달 주기를 반영하여 제국 전체가 ‘시간의 질서’ 속에 있다는 점을 상징한 것입니다.
히타이트 폭풍신 제례는 따라서 단순히 한 신에게 제를 올린 행위가 아니라, 다양한 신들을 통합하여 제국의 권위를 시각적으로 각인한 독창적 장치였습니다. 이는 메소포타미아의 아키투처럼 창조 신화를 낭송하거나, 이집트처럼 태양 주기를 건축으로 구현하는 방식과는 다른 차별성이었습니다. 히타이트는 ‘바위에 새겨진 신들의 퍼레이드’로 제국 질서를 영속화했습니다.
4. 왕권과 제례 – 폭풍신 앞에서 드러낸 겸손과 권위
히타이트 왕은 단순한 정치 지도자가 아니라 국가 제사의 최고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는 농경과 전쟁의 모든 성패가 폭풍신에게 달려 있음을 알았고, 따라서 제례를 직접 주관하는 것이 곧 왕권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절차가 되었습니다. 신에게 제물을 바치고 기도를 올리는 모습은 왕의 권위가 신적 질서와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정치적 행위였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왕이 신 앞에서 무조건 굴욕을 당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히타이트의 왕은 신전에 들어가기 전 무기와 왕권의 상징을 내려놓음으로써 인간으로서의 겸손을 드러냈습니다. 이는 바빌로니아 아키투에서 왕이 의례적으로 굴욕을 경험한 장면과 비교할 수 있지만, 성격은 다릅니다. 바빌로니아에서 왕은 신 앞에서 자신의 무력함을 드러내야 했던 반면, 히타이트 왕은 신과 동행하는 존재로서 겸손과 권위를 동시에 표현했습니다.
야즈일리카야의 부조는 이를 잘 보여줍니다. 특히 투두할리야 4세의 형상이 신들의 행렬 속에 등장하는 장면은, 왕이 단순한 인간이 아니라 신의 질서를 보장하는 대리인임을 시각적으로 드러냈습니다. 제국 말기의 불안정한 시대에, 왕은 신들의 보호 속에서 자신의 통치가 계속될 수 있음을 후세에 남기려 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히타이트 제례는 단순히 풍요를 기원하는 농경의례를 넘어, 신적 질서 속에서 왕권을 확인하고 정치적 권위를 연극처럼 보여주는 장치였습니다. 그것은 불안정한 국제정세와 내적 갈등 속에서 제국을 묶는 힘의 원천이기도 했습니다.
5. 폭풍신 제례의 유산과 오늘의 의미
히타이트 제국은 기원전 12세기, ‘바다 민족’의 침입과 내부 분열로 붕괴했지만, 야즐르카야 바위 성소에 새겨진 신들의 행렬은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유적이 아니라, 고대 아나톨리아인들이 어떻게 신과 세계, 그리고 정치 질서를 하나로 엮어 이해했는지를 보여주는 귀중한 기록입니다.
오늘날 이 유적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수많은 학자와 관광객을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방문객들은 단순히 오래된 조각을 보는 것이 아니라, 3천 년 전 사람들이 신과 인간, 생명과 죽음의 질서를 어떻게 상상했는지를 직접 체험합니다. 특히 야즐르카야의 신 행렬은 현대인에게도 '공동체가 함께 새로운 시작을 기념한다'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저는 히타이트 폭풍신 제례의 유산에서 두 가지를 느낍니다. 첫째, 신을 매개로 공동체를 하나로 묶으려는 의례적 장치는 오늘날 국가의 기념식, 국제 행사, 혹은 새해 축하 의식에서도 여전히 반복됩니다. 둘째, 자연과 인간 사회를 함께 꿰는 세계관은 오늘날 환경 문제와 공동체 위기를 생각할 때도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결국 히타이트인들이 바위에 새겨 남긴 폭풍신 제례는, 단순한 과거의 잔재가 아니라 현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집단적 기억의 무대’입니다. 신 앞에서 다짐한 질서의 갱신, 공동체의 연대 의식은 오늘날에도 우리 사회가 위기를 극복하는 방식과 닮아 있습니다. 돌에 각인된 신들의 행렬은 지금 이 순간에도, 인간 사회가 어떻게 초월적 가치와 연결되어야 하는지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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