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인간은 왜 하늘로 건축을 올렸는가
고대 인류는 늘 하늘을 바라보며 초월적 존재를 의식했습니다. 사냥과 농경의 성공, 생명과 죽음의 질서가 모두 하늘의 뜻에 달려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류는 하늘에 가까이 다가가려는 시도를 건축으로 실현했습니다. 터키의 괴베클리 테페(기원전 약 9600년경)나 영국의 스톤헨지(기원전 3000~2000년경)는 인류가 이미 자연을 넘어 인공적 제례 공간을 세웠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 유적들은 특정 집단이나 지역적 성소에 머물렀습니다.
수메르의 지구라트는 다릅니다. 기원전 21세기, 우르-남무와 그의 아들 슐기의 주도로 세워진 우르 지구라트는 달의 신 난나에게 바쳐진 성소이자, 도시 전체의 중심 공간이었습니다. 자연의 산이 없는 충적 평야에서 인공적으로 세운 이 건축은 도시 국가 차원에서 최초로 제례를 제도화한 건축물이었습니다.
저는 이 지점을 지구라트의 가장 큰 가치로 봅니다. 단순히 '세계 최초의 제례 건축'은 아니지만, 도시 공동체 전체가 참여하는 국가적 제례 공간을 가장 이른 시기에 제도화한 대표적 사례였습니다. 그래서 지구라트는 인류가 “왜 하늘로 건축을 올리는가?”라는 질문에 도시 문명 수준에서 내놓은 첫 번째 대답이었습니다.
2. 지구라트의 구조와 건축 – 성소로 오르는 계단
지구라트는 보통 3~7층의 계단식 구조로 세워졌습니다. 아래층은 넓고 위로 갈수록 좁아지며, 맨 꼭대기에는 신의 거처인 성소가 있었습니다. 정상의 성소는 하늘과 맞닿은 상징적 공간으로 여겨졌으며, 지구라트라는 말 자체가 아카드어 ziqqurratu에서 유래해 ‘높이 쌓아 올린 것’을 뜻합니다.
재료는 흙벽돌이 주를 이뤘지만, 내구성을 위해 구운 벽돌도 사용되었습니다. 외벽은 역청과 석회로 마감했고, 햇빛에 반사되어 멀리서도 빛나 보였습니다. 고고학적 발굴에 따르면 우르 지구라트는 완공 당시 약 20~30m의 높이로, 당시 평야 도시에서는 압도적인 존재감을 가졌습니다. 오늘날 일부만 남아 있지만, 이라크 정부와 국제 사회의 복원 작업 덕분에 당시의 위용을 어느 정도 엿볼 수 있습니다.
우르 지구라트는 2016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남부 이라크의 아흐와르(The Ahwar of Southern Iraq)」 복합유산에 포함된 우르 고대 도시의 핵심 유적입니다. 이 복합유산은 우르·우루크·에리두 등 고대 도시 유적과 광대한 습지를 함께 포괄하며, 자연과 문명이 공존한 공간으로 평가됩니다. 이로써 지구라트는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라, 인류가 남긴 가장 오래되고 상징적인 제례 건축 중 하나임을 국제적으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저는 지구라트를 볼 때마다 '건축 그 자체가 제례의 통로'였다는 점을 주목합니다. 제사장이 계단을 올라가는 행위는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곧 신에게 다가가는 상징적 과정이었기 때문입니다.
3. 제례와 공동체 – 건축 속에 녹아든 의식
지구라트는 단순히 신전 건축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의례를 위한 배경이 아니라 의례 그 자체였습니다. 정상의 성소에서 제사장은 신상에 옷을 갈아입히고, 곡물·맥주·포도주·향·양과 소를 바쳤습니다. 제물은 불에 태워 연기로 하늘에 올려졌고, 이는 신이 받아들였다는 증거로 해석되었습니다.
절기 제례 때는 도시 전체가 동원되었습니다. 음악가, 무용수, 행정가, 농민과 상인까지 모두 참여하여 도시가 하나의 거대한 제례 공간으로 변했습니다. 이때 행렬이 계단을 오르는 과정은 곧 공동체 전체가 신에게 나아가는 상징이었습니다.
저는 지구라트의 제례에서 '반복과 영속성'을 봅니다. 바빌로니아의 아키투 축제처럼 특정 시점에 왕이 굴욕을 당하며 신의 권위를 재확인하는 의례도 있었지만, 지구라트의 제례는 매일 반복되며 신의 현존을 끊임없이 체험하게 했습니다. 이것이 지구라트가 가진 독창성입니다. 신은 특정한 날에만 소환되는 존재가 아니라, 도시의 일상에 늘 현존하는 존재였던 것입니다.
4. 왕과 권위 – 정치와 종교의 결합
수메르의 왕은 단순한 행정가가 아니라 신과 백성을 이어주는 매개자였습니다. 우르-남무와 슐기는 지구라트를 세우며 점토판에 “나는 신을 위해 이 집을 세웠다”라고 기록했습니다. 이는 종교적 경건을 넘어, 왕이 신의 대리자임을 증명하는 정치적 선언이었습니다.
실질적인 제례는 제사장이 집행했지만, 건축은 왕의 이름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는 왕권이 곧 신의 질서 위에 있다는 사실을 시각적으로 드러내는 장치였습니다. 바빌로니아의 아키투가 매년 반복되는 시간적 의례로 왕권을 갱신했다면, 지구라트는 영구적 건축을 통해 왕권을 제도화했습니다.
저는 이 차이가 지구라트의 또 다른 가치를 만든다고 봅니다. 지구라트는 종교적 공간이면서 동시에 정치적 상징이었고, 공동체 전체의 권위를 제도화한 도시적 헌정물이었습니다.
5. 지구라트와 세계 제천 문화 – 닮음과 차별성
지구라트는 다른 문명들의 거대한 제례 건축과 비교할 때 유사성과 차별성을 동시에 지닙니다.
이집트 피라미드는 거대한 규모와 하늘로 뻗은 형태에서 닮았지만, 목적은 왕의 무덤이었고 초점은 사후 세계에 있었습니다. 반면 지구라트는 공동체가 살아가는 도시 한복판에서 신을 현재화했습니다.
마야와 잉카의 계단식 피라미드는 천문 주기와 밀접히 연관되었고, 인신 공양이 중요한 제례였습니다. 그러나 지구라트는 곡물과 가축을 제물로 삼았고, 도시 경제 전체가 동원되었습니다. 즉, 마야·잉카가 천문·희생 중심이었다면, 지구라트는 도시·경제 중심의 제례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예루살렘 성전은 단일신을 위한 배타적 성소였지만, 지구라트는 다신적 세계관 속에서 여러 신을 위한 성소 중 하나였습니다. 그럼에도 두 건축 모두 도시의 중심에 신의 거처를 둔 상징적 장치라는 점에서는 공통적입니다.
저는 이 비교 속에서 지구라트의 가치를 다시 확인합니다. 그것은 특정 왕이나 특정 신만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 도시 전체를 하나의 제례 질서 속에 끌어들인 대표적 사례의 건축물이었습니다. 이 점에서 지구라트는 세계 제천 문화 속에서 독보적 위치를 차지합니다.
6. 오늘의 시선에서 본 지구라트 – 살아 있는 상징
오늘날 우리는 국회의사당, 기념비, 올림픽 경기장, 초고층 빌딩 같은 건축물을 통해 공동체의 권위와 정체성을 드러냅니다. 이런 건축물들은 단순히 기능을 넘어, 사회가 스스로의 질서를 확인하는 상징적 무대가 됩니다.
우르의 지구라트 역시 고대 수메르인들에게 그러한 의미를 지녔습니다. 하늘을 향해 솟은 거대한 건축물은 도시 공동체가 신의 질서 속에 살고 있음을 매일 눈앞에서 확인하게 했습니다.
오늘날 이 유적은 2016년 유네스코가 지정한 ‘남부 이라크의 아흐와르’ 복합유산에 포함된 우르 고대 도시의 핵심 구성 요소로 등재되어, 고대 도시 문명과 제례 건축의 독창성을 보여주는 상징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쟁과 기후 변화, 관광 개발은 여전히 지구라트의 보존을 위협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구라트는 단순히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인류가 신과 권위, 공동체의 질서를 어떻게 건축 속에 담아왔는지를 보여주는 살아 있는 증언입니다.
저는 이 점에서 지구라트가 지금도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고 생각합니다. “왜 인간은 하늘로 건축을 올리는가?” 이 물음은 수메르에서 시작되어 피라미드, 성전, 성당, 그리고 오늘날의 마천루에 이르기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과거의 유적이 현재의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점에서, 지구라트는 여전히 살아 있는 상징이며, 세계 제천 문화 속에서 독보적 위치를 차지하는 건축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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