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속 낯선 공간, 환구단을 찾아서
1️⃣ 서울 속 낯선 공간, 환구단을 찾아서
서울 중심부, 시청역에서 불과 몇 걸음 떨어진 거리. 덕수궁 돌담길을 지나 회현 방면으로 걷다 보면, 웨스틴조선호텔 뒤편에 자리한 낮고 단정한 건물을 마주하게 된다. 외관은 기와지붕에 단청이 곱게 남아있지만, 주변 풍경은 고층 빌딩과 호텔로 가득하다. 이 건물이 바로 '황궁우(皇穹宇)'다. 대한제국 시기 고종 황제가 하늘에 제사를 올리던 '환구단(圜丘壇)'의 일부다. 그런데 이 역사적 장소는 많은 서울 시민에게조차 낯설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환구단은 원래 1897년, 대한제국이 선포되던 해에 고종의 칙령에 따라 건립되었다. 중국 천자의 하늘 제사를 계승하여, 자주 국가의 황제가 스스로 제례를 주관하는 제단이었다. 고종은 이 제단을 통해 조선이 더 이상 청의 속국이 아닌, 독립 국가임을 국내외에 선포하고자 했다. 이러한 정치적 의미를 가진 공간이었지만, 오늘날 환구단의 존재는 묻혀버렸다. 서울 한복판에 있음에도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져 있는 것이다.
가장 큰 이유는 공간의 변화다. 일제강점기인 1913년, 조선총독부는 환구단 대부분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조선철도호텔'(현 웨스틴조선호텔)을 세웠다. 이후 남겨진 황궁우와 석고 일부는 호텔의 부속 공간처럼 남겨졌다. 환구단은 사적 제157호로 지정되어 있지만, 환구단이라는 명칭보다 황궁우가 더 자주 언급되어, 그 정체성마저 흐릿해졌다.
이처럼 서울 중심에 있으면서도 존재감이 옅어진 환구단은, 우리의 기억에서 천천히 사라져 가고 있다. 그러나 이 공간은 단순한 유적이 아니라, 근대 국가의 정체성과 독립 의지를 상징했던 장소다. 그러므로 오늘날 환구단을 다시 찾는 일은, 단순한 답사를 넘어 역사적 자각의 행위라고 할 수 있다.
2️⃣ 환구단의 흔적을 따라가는 시간 여행
환구단의 흔적을 되짚기 위해서는 현재 남아 있는 황궁우를 중심으로 당시 제단의 구조를 상상해 보아야 한다. 황궁우는 환구단 경내에 세워진 전각으로, 하늘과 땅의 신령을 상징하는 위패(位牌)를 봉안하던 공간이다. 황궁우는 하늘을 상징하는 반구형 천장과 3층의 팔각 평면 구조를 갖춘 독특한 건축물로, 하늘과 조화를 이루는 상징성을 담고 있다. 내부는 원형 제단과 여덟 개의 기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제례에 사용된 위패와 제기가 안치되었다. 현재는 일반에 공개되지 않아 내부 관람은 불가능하다.
황궁우 바깥에는 과거 제례를 위한 석고(石鼓, 돌북) 3기가 배치되어 있다. 이 석고는 본래 석고각이라는 전각 아래에 위치했지만, 현재는 전각은 철거되고 석고 일부만 남아 있다. 석고는 제례의 장엄함을 상징하며, 환구단의 제례 방식과 상징성을 이해하는 단서를 제공한다.
본래 환구단은 지금보다 훨씬 넓은 공간이었다. 당시 지형도에 따르면, 현재의 서울광장과 웨스틴조선호텔 부지 전역이 환구단 경내에 해당했다. 외곽은 정방형 담장으로 둘러싸였고, 중심부에는 삼단 구조의 원형 제단이 조성되어 있었다. 제단 주위에는 향을 다루는 향대청, 황제가 머물던 어재실, 제사 준비를 담당하던 전사청, 석고를 보호하던 석고각 등 여러 부속시설이 배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도시 개발로 대부분의 구조물이 철거되었고, 현재는 황궁우와 석고 3기, 삼문, 그리고 일부 기단석만이 남아 명맥을 잇고 있다.
당시 제례는 매년 동지 무렵에 거행되었으며, 고종 황제는 제관의 정복을 갖추고 친히 환구단에 나아가 하늘에 제를 올렸다. 이는 단순한 종교 행위가 아니라, 국가의 정통성과 자주성을 대내외에 과시하는 정치적 선언이었다. 제례의 절차는 『대례의궤』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으며, 중국의 천단과 유사하되 한국적 요소가 반영된 것이 특징이다. 즉, 환구단은 '한국식 천단(天壇)'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역사적 의미에도 불구하고, 현재 환구단은 제례의 기능을 상실한 채 존재만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남아 있는 황궁우와 석고는 여전히 당시의 웅장함과 상징성을 간직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우리는 근대 서울의 또 다른 얼굴을 상상해 볼 수 있다.
3️⃣ 현장에서 본 것들 – 풍경, 안내문, 침묵
직접 환구단 현장을 찾으면, 그 첫인상은 다소 당혹스러울 수 있다. 시청광장을 지나 횡단보도를 건너면 '원구단 정문'이라는 표지가 보이고, 원구단 정문을 지나 계단을 따라 오르면 황궁우가 자리한 공간으로 진입할 수 있다. 다만 황궁우는 웨스틴조선호텔 부지 안쪽에 인접해 있어, 동선을 모르면 호텔과 혼동되거나 접근을 주저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황궁우로 입장할 수 있는 협문 앞에는 환구단에 대한 안내문이 설치되어 있고, 1907년 추정으로 찍은 환구단의 사진, 환구단 추정 배치도, 그 당시 황궁우의 외관 사진 등도 함께 볼 수 있다. 또한 석고와 난간석 석물 유적에 대한 안내문, 원구단 정문에 대한 별도의 안내문도 마련되어 있어 당시 환구단의 역사적 구조와 범위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 다만 그 내용은 일반 관람객이 쉽게 이해하기에는 다소 부족하거나 단편적일 수 있으며, 보다 체계적인 해설이나 스토리텔링이 뒷받침되지 않아 관람의 깊이를 더하기 어려운 점도 있다.
현장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침묵’이다. 도심 속 번화한 지역에 있음에도, 이 공간만큼은 조용하고 정적이 흐른다. 하지만 이 침묵은 경건함보다는 단절감에 가깝다. 역사 공간이면서도 ‘비역사적 공간’처럼 방치되어 있는 셈이다.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경계선에 놓인 환구단은, 그 상징성과 다르게 현실에서는 외면받고 있다. 이는 곧 우리의 역사 인식과 문화유산 관리 체계의 단면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황궁우는 여전히 서울 한복판에 있지만, 그 존재는 '보이지 않는 역사'로 남아 있는 것이다.
4️⃣ 다시 살아날 수 있을까 – 기억을 걷는 역사 산책로 제안
이제 우리는 환구단을 단지 ‘복원해야 할 문화재’로만 볼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기억의 방식으로 연결할 수 있는 역사 자산으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제안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은, 서울 중심의 역사 공간을 잇는 시민 참여형 역사 산책로 조성이다.
예를 들어, 덕수궁 → 중명전 → 환구단 → 명동성당 → 경교장 등으로 이어지는 근대사 체험 루트를 개발하는 것이다. 이 경로는 대한제국의 황궁(덕수궁), 을사늑약 체결 장소(중명전), 제천의례의 상징(환구단),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거점(명동성당), 그리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의 거처(경교장)로 연결된다. 이 모두가 도보로 이동할 수 있는 거리 내에 있고, 각 공간이 갖는 역사적 맥락도 유기적으로 이어진다.
이 산책로는 단순한 관광 코스를 넘어, 시민과 학생들이 서울의 근현대사를 몸소 체험하며 기억할 수 있는 ‘살아 있는 교실’로 기능할 수 있다. 더 나아가, AR(증강현실) 기술을 활용한 모바일 앱과 연결하여, 사용자가 환구단 자리에 스마트폰을 비추면 복원된 제단과 고종의 제례 모습을 볼 수 있게 하는 방식도 가능하다.
문화유산은 단지 물리적 공간의 보존이 아니라, 의미의 재해석과 공유를 통해 살아 움직인다. 환구단을 둘러싼 침묵의 공간에, 우리가 새로운 기억을 부여한다면, 그곳은 다시 살아날 수 있다.
‘보이지 않는 역사’는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기억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환구단이 다시 우리의 일상 속에 스며들기 위해서는, 그것을 기억하려는 노력, 그리고 연결하려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우리는 이제 질문해야 한다. 서울의 중심에서 가장 조용한 이 유적이, 과연 어떤 이야기를 품고 있는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