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제천 문화②] 북유럽 노르드 블로트 — 겨울과 바다를 건너는 약속
1. 서론 — 겨울의 어둠을 건너기 위한 의례
겨울이 오면 북유럽의 풍경은 거의 멈춰버린 듯 고요해집니다. 낮은 짧아지고 바다는 거칠어지며, 초록빛 들판은 눈 속에 파묻힙니다. 농업으로 먹고살기엔 계절이 너무 짧았고, 바다로 나가자니 폭풍은 예측할 수 없었습니다. 그 불안정한 땅에서 사람들은 한 가지 방식을 만들어냈습니다. '모두를 불러 모아 신과 계약을 새로 쓰는 것. 그것이 블로트(Blót)'였습니다.
블로트는 고대 노르드어로 ‘바치다’라는 뜻을 지닙니다. 그러나 이 의례는 단순히 바치는 행위가 아니었습니다. 올해도 세계가 무너지지 않도록, 인간과 신이 함께 질서를 붙잡는 약속이었습니다. 눈보라가 몰아치기 전, 그들은 신전의 불을 밝히고 잔치를 베풀며 맹세했습니다. 겨울을 견디기 위해, 다시 하나가 되기로.
2. 의례의 장면 — 피와 불, 그리고 함께 먹는 일
블로트의 중심에는 늘 불과 피와 고기와 술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마을의 목조 신전(호프, Hof)이나 언덕의 제단에 모였습니다. 추장이나 지역 지도자가 제물인 소·말·돼지를 도살하면, 뜨거운 피가 도랑을 타고 흐릅니다. 사람들은 그 피를 제단과 기둥, 자신들의 이마에까지 찍으며 신의 생명력을 나눕니다.
곧이어 불이 피어오릅니다. 제물의 고기는 커다란 솥에서 끓여지고, 통에 담긴 맥주가 줄줄이 열립니다. 이 잔치가 바로 블로트의 완성입니다. 북유럽인들은 제물을 불태워 없애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신과 똑같은 음식을 나눠 먹음으로써, 신의 질서를 자신의 몸에 들인다고 여겼습니다.
이런 방식은 오늘날의 눈으로 보면 낯설지만, 그들에게는 세계를 작동시키는 유일한 기술이었습니다. 실제로 덴마크·북독일의 이탄늪에서는 기원전 1000년~기원후 초기에 바쳐진 동물과 인간의 유해, 무기와 전리품이 다수 발견됩니다. 자연과 신에게 생명을 돌려주며 계절을 넘기려는 발상은 이미 그 무렵 자리 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후 철기시대(기원전 500년~기원후 400년경)에는 마을마다 상설 의례장이 생겼고, 바이킹 시대(8~11세기)에 이르면 블로트는 계절축제와 항해 출정, 왕의 즉위와 완전히 결합된 공적 의식으로 발전했습니다.
불과 피, 고기와 술—이것은 단순한 재료가 아니라 세계가 계속 굴러가게 만드는 연료였습니다. 블로트는 그 연료를 다시 채우는, 해마다의 시동식이었습니다.
3. 권력의 무대 — 왕과 바이킹이 맺은 계약
블로트는 신에게 바치는 제사이면서 동시에 왕과 공동체의 계약식이었습니다. 추장과 왕들은 이 의식을 주관하며 신에게서 통치권을 위임받았다고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그 장면을 모두가 지켜보았습니다. 신에게 인정받은 자만이 사람을 통솔할 수 있다는 규칙이 공동체에 깊게 새겨졌습니다.
이 정치적 블로트를 가장 잘 보여주는 곳이 스웨덴의 '감라 우프살라(Gamla Uppsala)'입니다. 11세기 독일인 연대기 작가 아담 브레멘(Adam of Bremen)은 자신의 저서 『함부르크 교구사(Historia Hammaburgensis Ecclesiae Pontificum)』(1070년대 집필)에서, 우프살라에서 9년에 한 번씩 소·말·사슴·사람까지 바치는 대블로트가 열렸다고 기록했습니다. 그는 덴마크 국왕 스벤 2세와 주교들의 말을 인용한 것이었고 직접 목격한 것은 아니지만, 감라 우프살라 일대에서는 실제로 6세기 이후 대규모 의례장과 동물 희생 흔적, 왕실급 연회홀이 발굴되었습니다. 인신 희생 여부는 논쟁이 남지만, 왕권과 제례가 결합한 국가급 블로트가 존재했다는 점은 부정되지 않습니다.
이런 국가 블로트는 곧 바이킹 사회의 엔진이기도 했습니다. 바이킹 선단은 출정 전 블로트로 바람과 운을 빌었고, 귀환 후 블로트 잔치에서 전리품을 분배하며 새 질서를 확정했습니다. 고기와 술이 돌고, 전사가 맹세를 올리며, 추장이 그 맹세를 신 앞에서 봉인했습니다. 그 순간에야 사람들은 전리품을 나누고 항해의 피로를 풀며, 다음 모험을 계획할 수 있었습니다.
노르웨이의 하콘 시구르드손(재위 975~995)은 기독교화 압박 속에서도 블로트를 주관하며 라데(Trøndelag) 지역을 통치했고, 아이슬란드의 고디(추장-사제)들은 블로트를 통해 지역 권력을 장악한 채 국회(알팅, Althing)에서 발언권을 행사했습니다. 덴마크의 레리에(Lejre) 유적지에서는 왕궁과 대연회홀, 제단터가 함께 발굴되어, 왕권·연회·제례가 하나의 세트로 묶여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바이킹의 항해는 돛과 키만으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신에게서 권위를 부여받은 추장이 있어야 사람과 배가 모였고, 그 추장이 블로트를 통해 공동체의 동의를 재확인할 때만 바다는 열렸습니다.
4. 충돌과 잔향 — 금지된 의례, 살아남은 정신
10세기 말에서 12세기 사이, 기독교가 스칸디나비아를 휩쓸면서 블로트는 급격히 금지되었습니다. 아이슬란드는 999/1000년 알팅 회의에서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했고, 노르웨이·덴마크·스웨덴에서도 왕과 교회가 협력해 사원(호프)을 철거하고 블로트 주관자였던 고디 제도를 없앴습니다. 피를 뿌리고 잔치를 벌이는 제사는 이단으로 간주되었고, 블로트는 지하로 숨어들었습니다.
하지만 의례의 정신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동지 무렵의 겨울 블로트는 ‘율(Yule)’이라는 이름으로 크리스마스에 흡수되었고, 술잔을 돌리며 신과 조상에게 맹세하던 의식은 '숨벨(Sumbel)'이라는 음주 전통으로 남았습니다. 스웨덴의 일부 지역에서는 여성 수호신에게 제를 올리던 '디사블로트(Disablót)'가 민속 축제로 형태를 바꿔 전승되기도 했습니다.
블로트는 불과 피의 의례에서 빠져나와 가정과 마을의 연회, 계절축제, 교회 앞 공동식사 속에 스며들었습니다. 오늘날 스칸디나비아 사람들이 공동 식탁, 계절 리듬, 공적 신뢰를 중시하는 문화적 성향을 보이는 데에는, 이런 오랜 집단의 기억이 여전히 박혀 있는지도 모릅니다.
바이킹의 배는 더 이상 항해하지 않지만, 계절의 문턱에서 모두를 모아 약속을 새로 쓰는 일은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블로트는 이렇게 묻습니다.
“겨울을 앞두고, 우리는 어디에서 누구와 무엇을 나눌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