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제천⑤] 유목의 하늘, 텡그리 제례(몽골·카자흐)
1. 유목의 땅에서 하늘을 향한 제례가 태어나다
아시아 대륙의 심장부에 펼쳐진 몽골·카자흐 초원은 사방이 지평선으로 끝나는 공간입니다. 산줄기나 수목이 드문 이곳에서는 땅보다 하늘이 더 크게 느껴지고,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대지보다 하늘을 더 절대적인 질서로 체감하게 되었습니다. 농경 문명이 비옥한 토양을 숭배했다면, 유목 문명은 끝없이 펼쳐진 하늘을 숭배한 것입니다.
이러한 환경적 조건 속에서 형성된 것이 바로 텡그리(Tengri, ‘하늘’ 또는 ‘하늘신’) 중심의 제천 신앙입니다. 고고학과 문헌 연구에 따르면, 기원전 1천년대 유라시아 초원의 유목민들(스키타이·사카 등) 사이에서도 태양·하늘·불을 숭배하는 전통이 있었고, 흉노(기원전 3세기~기원후 1세기)는 한서 등의 사료에 ‘천(天)과 산천에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몽골·알타이권의 고분군에서는 말·양 등을 제물로 바친 흔적도 발견됩니다.
이후 돌궐(Göktürk, 6~8세기)의 오르혼(Orkhon) 비문에서는 처음으로 ‘푸른 하늘 텡그리(Üze Kök Tengri)’가 직접 언급되며, 군주의 권위가 텡그리로부터 위임된다는 선언이 새겨졌습니다. 이로써 텡그리는 단순한 자연신이 아니라, 유목 국가를 지탱하는 초월적 질서의 근원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2. 유목민과 텡그리 — 땅이 아닌 하늘을 중심에 둔 신앙 구조
텡그리 신앙은 왜 유목민에게 그렇게 절대적이었을까요? 이는 초원의 지리·사회·시간 구조에서 비롯된 필연이었습니다.
우선 지리적 측면에서, 중앙유라시아 초원은 건조한 대륙성 기후로 농경에 부적합했습니다. 비가 적고 강수량이 불규칙하여, 일정한 정착지를 중심으로 한 농업은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기 어려웠습니다. 대신 계절에 따라 가축을 이끌고 수백 km를 이동하는 유목이 생존의 기본 방식이 되었고, 이로 인해 사람들은 변하지 않는 기준으로서 ‘하늘’을 숭배하게 되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땅이 계속 바뀌니, 유일하게 늘 존재하는 푸른 하늘이 곧 ‘세계의 중심’이었던 것입니다.
둘째, 사회적 측면에서, 유목 부족 사회는 혈연과 전사 집단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어 고정된 법·제도가 약했습니다. 부족 간 분쟁과 동맹이 수시로 바뀌는 구조였기 때문에, 공통의 규범과 질서를 부여할 절대적 존재가 필요했습니다. 텡그리는 초월적 질서의 상징이자, 부족 연합을 묶는 상위 권위로 기능했습니다. 실제로 몽골 제국의 칭기즈 칸은 자신을 ‘영원하신 하늘 텡그리의 뜻을 받드는 자’로 선포하며 각 부족의 충성을 확보했습니다.
셋째, 시간적 측면에서, 유목민의 삶은 순환적 주기에 기반했습니다. 가축의 번식·이동·겨울과 여름 유목지 교대 등 계절 순환이 생존의 핵심이었기에, 이들은 주기적으로 질서를 재확인하는 제례를 통해 세계의 순환을 유지한다고 여겼습니다. 텡그리 제례는 단순한 신앙이 아니라, 초원 세계를 다시 가동시키는 의례적 장치였던 것입니다.
3. 텡그리 제례의 구조 — 초원 위의 국가적 제천
텡그리 제례는 본질적으로 유목국가의 공적 제천이었습니다. 돌궐·위구르·몽골 제국 시기를 거치며 점차 정형화되었고, 그 전통은 카자흐·키르기즈 등 후대 유목민에게도 지역적 변형을 거쳐 계승되었습니다.
제단(ovoo, 몽골어: овоо, ‘오보’)은 몽골어권에서 제례의 중심이었습니다. 오보는 돌을 층층이 쌓아 만든 원뿔형 혹은 봉분형 제단으로, 산마루·고개·초지 경계에 세워졌습니다. 각 부족·씨족은 주로 늦봄~초여름 오보 앞에서 하늘(텡그리)과 산령에 제향을 올렸고, 푸른 하닥(khadag)을 감아 하늘을 상징했습니다. 흰 하닥은 정결·축원(우유·유제품과 연계), 노란색 천은 티베트-불교 전통의 영향으로 쓰이는 경우가 있으나, 색의 의미를 획일적 도식으로 고정하기는 어렵습니다.
한편 카자흐·키르기즈 지역은 ‘오보’라는 명칭·형태가 일반적이지 않으며, 대신 산·샘 제의나 타삿튀크(tasattyq)와 같은 기우 의례가 이어졌습니다. 이 의례는 후대에 이슬람의 ‘이스티스카(istisqa)’와 결합해 전승되었지만, 여전히 공동체가 모여 자연과 초월적 힘에 비를 기원한다는 점에서 공적 제의로 기능했습니다.
봉헌은 대체로 우유·버터·아이락(airag, 발효유; 카자흐·키르기즈 qymyz)·보드카 등을 흩뿌리는 비혈 봉헌이 널리 행해졌습니다. 다만 고대~중세 초기에는 말·양 등 동물 희생도 병행되었고, 특히 몽골에서 불교 수용 이후(16세기경~)에는 살생을 줄이고 비혈 봉헌의 비중이 커지는 경향이 뚜렷해졌습니다. 즉 텡그리 제례의 희생 방식은 시대·지역·맥락에 따라 달라졌습니다.
의식의 주재는 칸(군주)·유력 귀족·사제가 맡는 경우가 많았고, 샤먼(투르크계 qam/kam, 몽골어 böö, 카자흐·키르기즈 bakhsy)은 북(tüngür)이나 콥(qobyz) 같은 악기와 주문으로 황홀경을 매개하며 보좌했습니다. 텡그리 신앙은 샤머니즘적 기법을 포함하지만, 하늘(텡그리)의 이름으로 왕권과 연맹 질서를 승인·갱신하는 ‘국가 이데올로기’로 발전했다는 점에서, 단순 샤머니즘을 넘어서는 공적 종교 체계로 이해하는 것이 정확합니다.
4.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초원의 하늘제 — 국가와 공동체의 기억
텡그리 제례는 몽골 제국 붕괴(14세기) 이후에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몽골이 티베트 불교를 국가 종교로 채택한 이후에도, 국가 제례의 형식과 상징은 텡그리 전통 위에 불교적 요소가 덧씌워진 형태로 존속했습니다. 오늘날까지도 몽골 전역에서는 매년 6~7월에 ‘오보 제례(Овооны тахилга, Ovoo Worship)’가 열립니다. 각 지역 행정 단위·씨족·목축 공동체는 산 정상이나 고개에 있는 오보에 모여, 푸른 하늘에 젖·우유·아락을 뿌리고, 푸른 천(하늘)을 묶으며, 세 바퀴를 돌며 축원합니다. 참석자들은 모두 전통복 델(Deel)을 입고 말·낙타·양을 몰고 와 대규모 유목 축제(나담, Naadam)와 병행하기도 합니다.
카자흐스탄·키르기스스탄에서도 봄·초여름에 자연과 하늘에 제를 올리는 전통 의례가 일부 지역에서 부활하고 있습니다. 카자흐스탄은 2010년대 이후 전통문화 보존을 위한 국가 무형문화유산 제도를 운영하며, ‘텡그리’ 세계관을 주제로 한 축제·관광·교육 프로그램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이 제례들은 단순한 민속공연이 아니라, 유목 정체성과 국가 기원의 상징으로서 기능합니다.
이런 점에서 텡그리 제례는 오늘날까지 국가와 공동체 차원에서 이어지는 몇 안 되는 유목 기원 제천입니다. 일본 신토·발리 갤룽간·태국 왕실불교 같은 농경 기원 제례는 현대까지 이어진 사례가 많지만, 유목 제천이 현대 국가의 공식 의례·문화행사로 제도화된 경우는 매우 드물며, 텡그리는 그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5. 결론 및 나의 의견 — ‘하늘’로 국가를 묶은 유목의 기억
텡그리 제례는 인류 제천사에서 매우 독창적인 위치를 차지합니다.
하나는 그 신학적 구조 때문입니다. 농경 문명이 대지의 풍요를, 해양 문명이 바다의 순환을, 산악 문명이 봉우리의 영험을 숭배했다면, 텡그리 제례는 끝없이 이어지는 하늘을 신으로 삼았습니다. 경계도 성소도 건축도 없이, 어디서든 하늘만 바라보면 의례가 시작될 수 있었던 제천. 이것은 정착지 중심의 제천과는 전혀 다른 발상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 정치적 기능입니다. 텡그리 제례는 단순히 하늘에 감사하는 의식이 아니라, 유목국가의 통치 질서를 제도화하는 장치였습니다. 왕이나 카간은 ‘영원한 하늘 텡그리’의 뜻을 위임받았다고 선언함으로써, 혈연 중심 부족들을 하나의 국가로 묶을 수 있었습니다. 이 점에서 텡그리는 제천이자 헌법이었습니다.
저는 바로 이 지점에서 텡그리 제례가 현대에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의 국경과 도시, 헌법은 대부분 ‘땅’을 기준으로 하지만, 유목 제국들은 ‘하늘’을 기준으로 자신들을 묶었습니다. 그들은 공동의 영토보다 공동의 하늘 아래 있다는 상징으로 연대했습니다. 현대 사회가 기후 위기·국경 갈등·문화 분열로 흔들리는 지금, 텡그리 제례는 국경을 넘어서는 연대의 상징으로 다시 읽힐 수 있습니다.
결국 텡그리는 이렇게 묻습니다.
“우리는 어떤 하늘 아래 함께 살고 있는가.”
저는 이 질문이야말로 오늘날 우리가 제천문화를 연구하고 기억해야 하는 가장 설득력 있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텡그리는 초원에서 하늘로 시작한 제천이었지만, 오늘날 우리에게는 지구 공동체의 상징적 하늘로 다시 떠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