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제천 문화

[아시아 제천⑤] 발리 갤룽간 – 신들이 지상에 머무는 열흘

인포쏙쏙+ 2025. 9. 11. 23:51

1. 갤룽간의 기원 — 신들이 돌아온 날

발리의 갤룽간(Galungan) 축제는 흔히 ‘신들의 귀환’으로 설명됩니다. 그러나 이 표현에는 단순한 종교적 의례를 넘어서는 깊은 세계관이 담겨 있습니다.
갤룽간은 오늘날 발리력(Pawukon) 상 210일마다 돌아오며, 이날을 기점으로 신들과 조상 영혼이 지상에 내려와 열흘간 머문다고 믿습니다. 그 열흘 동안 마을 전체는 우주의 중심(부아나 아궁, Buana Agung)으로 전환되고, 인간은 하늘의 질서에 다시 편입됩니다.

갤룽간의 기원은 5~6세기 무렵 인도에서 유입된 힌두교가 9세기경 자바·발리 왕국의 국가 제례 체계와 결합하면서 형성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인도 본토에서 힌두교가 전래되기 전, 발리에는 애니미즘·조상숭배·정령신앙이 공존했는데, 이후 힌두-불교 사상과 융합되며 ‘아가마 힌두 다르마(Agama Hindu Dharma)’라는 발리 특유의 종교 체계가 형성되었습니다.
갤룽간의 근본 의미는 마야단와(Mayadanawa) 전설에 뿌리를 둡니다. 마야단와는 자신을 신이라 칭하며 제사를 금지해 신들을 쫓아냈고, 세상은 기근과 혼란에 빠졌습니다. 인드라 신이 그를 무찌르고 신들이 돌아온 날이 바로 첫 갤룽간이었다고 전해집니다. 이 설화는 오늘날까지 갤룽간의 핵심 의미를 규정합니다. 즉, 갤룽간은 혼돈(Adharma)을 물리치고 질서(Dharma)를 회복한 날, 그리하여 세상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날입니다.

 

2. 열흘간의 의례적 시간 — 신과 조상이 머무는 구조화된 우주

갤룽간은 하루짜리 축제가 아닙니다. 신과 조상이 지상에 머무는 열흘간의 성스러운 시간으로 이해됩니다. 이 시간은 일상에서 벗어난 의례적 세계이며, 이 열흘 동안 마을은 거대한 제단으로 변모합니다.

축제 당일 전, 사람들은 몸과 마음을 정화하기 위해 '멜루캇(Melukat)'이라는 정화 의식을 치릅니다. 이는 신성한 샘이나 바다, 폭포에서 물로 목욕하며 부정한 기운을 씻어내는 의식으로, 갤룽간을 맞이하기 전 신을 모실 자격을 갖추는 통과의례입니다. 멜루캇은 단순한 위생 행위가 아니라, 신과 인간의 경계선을 넘어가는 상징적 준비로 간주됩니다.

갤룽간 당일 새벽, 사람들은 집집마다 가문의 사당(Merajan)에서 조상신을 맞이하는 봉헌 의례를 올립니다. 바나나, 코코넛, 향, 쌀, 사탕수수, 닭고기, 전통 과자를 정갈히 차려 바칩니다. 사당뿐 아니라 마을의 중심 사원(Pura Desa)과 조상 사원(Pura Puseh)에도 제물이 올라갑니다.

갤룽간을 시각적으로 상징하는 것은 '펜조르(Penjor)'입니다. 높이 8~10미터에 이르는 대나무 장대에 코코넛, 곡식, 직조 천, 꽃장식을 매달아 곡선을 그리며 하늘로 솟게 세웁니다. 곡선의 대나무는 지하 세계의 용(나가, Nāga)과 대지의 여신 이부 퍼르티위(Ibu Pertiwi)를 상징하며, 산에서 하늘로 이어지는 축(軸)을 형상화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즉, 펜조르는 마을을 우주의 축(axis mundi)으로 재구성해 신들의 하강 통로를 여는 장치입니다.

축제 기간 내내 마을에는 '바룽(Barong)'이 순회합니다. 바룽은 조상신이 현신한 존재로 여겨지며, 사자·멧돼지·호랑이·용의 모습을 한 탈을 쓰고 춤추며 마을을 돌며 악귀를 몰아냅니다. 사람들은 바룽이 내민 머리카락을 대문 위에 걸어 가문의 수호부적으로 삼습니다. 이 행위는 단순한 퍼포먼스가 아니라, 신이 공동체를 순찰하며 질서를 세우는 상징적 장면입니다.

마지막 열흘째는 '쿠닝간(Kuningan)'입니다. 이날 신들은 하늘로 돌아가며, 사람들은 노란 쌀밥(쿠닝, kuning)과 타미앙(tamiang)이라 불리는 둥근 방패 모양의 장식을 바칩니다. 노란 쌀은 태양·생명·번영을, 타미앙은 악을 막는 보호막을 상징합니다. 이로써 신들은 완성된 질서를 남기고 떠나며, 다음 갤룽간까지 세계는 안정된 상태를 유지한다고 여겨집니다.

 

3. 신현(神顯)의 제례 —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갤룽간

갤룽간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신과 조상이 인간 세계로 ‘내려오는’ 제천이라는 점입니다. 대부분의 제천에서 인간은 제물을 바치며 신에게 ‘올라가길’ 바라지만, 갤룽간은 정반대로 신과 조상을 지상으로 초청하여 마을에 머무르게 하는 의례입니다. 발리인들은 이 10일을 ‘신현(神顯, theophany)’이라 부르며, 이 기간 동안 마을 전체가 신들의 현존지로 간주됩니다. 모든 인간의 행위는 신의 시선 아래에 있다고 여겨지며, 평소의 갈등과 범죄 행위는 엄격히 금지됩니다. 심지어 사소한 언쟁조차 금기시되며, 갤룽간 기간에 다투면 조상신에게 저주를 받는다고 믿습니다.

이러한 세계관 속에서 갤룽간은 마을 공동체 전체가 총동원되는 제천으로 기능합니다. 축제 2~3주 전부터 각 가정과 반자르(Banjar, 마을 공동체)는 사원을 청소하고 공용 제단을 수리하며, 거리마다 장식할 펜조르(Penjor)를 제작합니다. 모든 비용과 노동은 공동 분담 방식으로 충당되고, 각 가문은 조상의 넋을 맞이하기 위한 봉헌 음식을 준비합니다. 발리 정부는 갤룽간 전통을 초·중등 교과과정에 편성하고, 마을청소년회(Seka Teruna-Teruni)가 주관하는 전통춤·가믈란 음악 경연을 지원해 세대 간 전승을 제도적으로 보장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준비된 축제는 오늘날 ‘하리 라야 갤룽간(Hari Raya Galungan)’이라는 공식 명칭으로 불리며, 발리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국가 공휴일이자 종교 축제로 자리 잡았습니다. 갤룽간 기간에는 발리 전역의 학교·관공서·상점이 모두 문을 닫고 마을 단위의 총동원 체제가 작동합니다. 이 시기 발리의 거리는 펜조르로 가득 차고, 집집마다 정성껏 차린 봉헌 음식이 사당에 올라갑니다. 바룽(Barong) 무용단은 전통 가믈란 음악에 맞추어 마을을 돌며 악귀를 쫓고, 마을 중심 사원(푸라 데사, Pura Desa)에서는 대규모 공동 제향이 열립니다. 젊은이들은 전통춤과 악기 경연에 참여하고, 어른들은 조상 묘를 찾아 제사를 지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갤룽간이 관광객을 위한 ‘퍼레이드’가 아니라 지금도 전 주민이 실질적으로 참여하는 살아 있는 제례라는 사실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고대 제천의 다수가 종교 유산·관광자원으로만 남은 것과 달리, 갤룽간은 오늘날까지도 공동체 운영의 실질적 중심으로 기능하는 드문 사례입니다.

[아시아 제천⑤] 발리 갤룽간 – 신들이 지상에 머무는 열흘

 

4. 결론 및 나의 의견 — ‘질서의 귀환’을 반복하는 인류적 장치

갤룽간은 겉보기엔 신과 조상을 기리는 축제 같지만, 그 본질은 혼돈으로 기운 세계를 다시 질서로 돌려세우는 사회적 제례입니다.
마야단와 전설에서처럼 인간이 교만해질 때 신들은 떠나고 세계는 무너집니다. 갤룽간은 바로 그 질서를 주기적으로 복원하는 우주적 리셋 장치입니다. 발리인들은 매번 신들을 다시 초청하여 열흘간 머물게 하고, 그들의 발걸음으로 공동체와 자연에 생명력을 불어넣습니다.

저는 이 점에서 갤룽간을 세계 제천사 속에서도 독보적인 제례로 봅니다. 대부분의 제천이 신에게 올라가는 상향적 구조였다면, 갤룽간은 신을 지상으로 끌어들여 인간 곁에 앉히는 하향적 구조입니다. 이 차이는 단순한 형식의 차이가 아니라 우주관의 차이입니다. 인간은 신의 은총을 기다리는 존재가 아니라, 신과 함께 우주를 재건하는 동반자로 설정됩니다.

현대사회는 제례를 잃어버렸고, 우리는 각자의 삶에서 고립된 채 살아갑니다. 저는 갤룽간에서 그 반대의 모델을 봅니다. 모든 구성원이 손을 모아 펜조르를 세우고, 신과 조상을 초청해 함께 살아가는 10일간의 공동체. 그 시간 동안 발리는 한 개의 거대한 제단이며, 모든 일상은 신의 시선 아래에서 다시 윤리적 질서를 회복합니다.

갤룽간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혼돈으로 기운 세계를, 우리는 어떻게 다시 세울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발리의 대답은 명확합니다.
“신과 조상, 자연과 인간이 다시 한자리에 모일 때, 세계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저는 이 오래된 대답이야말로, 오늘날 전 지구적 혼돈 속에서 우리가 제천문화를 다시 돌아보아야 하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