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제천 문화

[아시아 제천③] 인도 아쇼카 석주와 불교 국가 제례 – ‘법’을 하늘로 올리다

인포쏙쏙+ 2025. 9. 10. 23:42

서론 – 전쟁의 상처와 새로운 제천의 길

아시아의 고대 문명에서 제천은 단순한 종교의식에 그치지 않고, 공동체를 묶고 권력을 정당화하는 핵심 장치였습니다. 하늘에 올리는 제사의 무대는 왕이 신 앞에서 권위를 확인하는 정치적 의례이자, 공동체가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상징적 순간이었습니다. 예컨대 메소포타미아의 아키투(Akitu) 축제는 해마다 신과 왕의 계약을 갱신하는 의례였고, 수메르의 지구라트 제례는 도시의 중심에서 하늘과 땅을 잇는 성소 위에서 진행되며 권위와 질서를 가시적으로 드러냈습니다. 이러한 전통은 고대 사회가 왜 하늘과의 소통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그러나 인도의 경우, 이 흐름과는 다른 독특한 길이 열렸습니다. 마우리아 왕조의 3대 군주인 아쇼카 대왕(Aśoka, 기원전 약 304~232년, 재위 기간: 기원전 268~232년 )은 칼링가 전쟁(기원전 261년)의 참혹한 경험을 계기로 불교에 귀의했습니다. 그는 전쟁의 승리나 무력의 과시가 아니라, 자비와 도덕, 그리고 '다르마(Dharma, 법과 올바름)'를 국가 통치의 중심에 두었습니다. 더 나아가 그는 불교적 가르침과 제례 규범을 석주(石柱, Ashokan Pillars)와 바위에 새긴 칙령(Edicts of Ashoka)의 형태로 제국 전역에 반포했습니다.

아쇼카의 등장은 단순히 한 제국의 정치사적 사건을 넘어섭니다. 그의 불교적 전환은 제례 문화를 ‘신과 왕의 관계를 확인하는 의례’에서 ‘보편적 도덕(다르마)을 공적으로 선포·내면화하는 의례’로 확장시켰고, 아시아 제천 문화사의 분기점을 이루었습니다.

 

본론 – 아쇼카 석주와 불교 국가 제례의 역사적 의미

1. 칼링가 전쟁과 ‘다르마’의 발견

 

아쇼카의 통치는 마우리아 제국의 전성기와 맞물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치세를 결정적으로 바꾼 사건은 칼링가 전쟁이었습니다. 이 전쟁에서 전해지는 기록에 따르면 10만 명 이상이 전사하고, 수십만 명이 포로가 되었으며, 수많은 사람이 삶의 터전을 잃었습니다. 아쇼카는 이 참상을 목격한 뒤 극심한 후회를 느꼈다고 합니다.

이 사건은 그가 불교를 받아들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아쇼카는 자신이 지배하는 제국의 기반을 무력과 제물에 두지 않고, ‘불살생’과 ‘자비’라는 보편적 가치를 중심으로 재정립하고자 했습니다. 이는 곧 국가적 차원의 제례가 폭력적 희생에서 도덕적 윤리와 법의 선언으로 전환되는 순간이었습니다.

 

2. 돌에 새겨진 다르마 – 아쇼카 석주와 칙령

아쇼카는 자신의 신념을 제국 전역에 알리기 위해 특별한 매체를 선택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아쇼카 석주(Aśoka Pillars)'와 '암각 칙령(Rock Edicts)'입니다. 현재까지 인도, 네팔,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등지에서 30여 곳 이상의 비문 유적(석주·암각 포함)이 발견되었습니다. 이 돌기둥에는 불교적 가치와 통치 원리, 백성을 향한 권고가 새겨져 있습니다.

가장 유명한 예는 사르나트(Sarnath) 석주입니다. 그 꼭대기에 자리한 '사자상(Lion Capital of Ashoka, 기원전 3세기, 현재 인도 국장 사용)'은 네 마리의 사자가 등을 맞대고 서 있는 형상으로, 진리와 권위를 온 사방으로 퍼뜨리는 상징으로 해석됩니다. 이는 단순한 장식물이 아니라, 제국 전체에 “하늘의 법(다르마)이 우리를 지배한다”는 메시지를 새긴 상징적 제단이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전의 고대 제천 건축이 물리적으로 하늘에 닿는 구조물(지구라트, 피라미드, 천단 등)을 세워 초월적 질서를 구현했다면, 아쇼카의 석주는 언어와 글자를 매개로 초월적 질서를 새겨 넣었다는 사실입니다. 돌에 남긴 글귀는 단순한 법령이 아니라, 하늘의 뜻을 땅 위에 새겨 넣는 의례적 행위였습니다.

[아시아 제천③] 인도 아쇼카 석주와 불교 국가 제례 – ‘법’을 하늘로 올리다

 

3. 불교 국가 제례의 제도화 – 다르마의 정치적 장치

아쇼카는 즉위 후 초기에는 기존의 브라만적 전통을 따랐으나, 칼링가 전쟁(기원전 261년) 이후 불교에 깊이 귀의하며 제국 통치의 중심 이념으로 삼았습니다. 그는 불교 승려들을 보호하고, 사찰과 불탑(스투파, Stūpa)을 건립했으며, 기원전 약 250년경에는 파탈리푸트라에서 열린 제3차 불교 결집을 후원하여 불교 교단을 정비했습니다. 또, 아들 마힌다(Mahinda)와 딸 상가미타(Saṅghamittā)를 스리랑카에 파견해 불교를 전파했습니다.

그가 추진한 불교적 국가 제례는 왕권의 성격을 새롭게 정의했습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아키투에서 왕은 매년 신에게 굴복하며 권위를 재확인했지만, 아쇼카는 자신을 ‘신의 대리인’이 아니라 법의 봉사자로 규정했습니다. 왕이 주관하는 제례는 더 이상 신에게 희생을 바치는 장이 아니라, 불교의 계율을 선포하고 자비와 평화를 다짐하는 윤리적 제천의 장이 된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히타이트의 폭풍신 제례나 페르시아 조로아스터의 불 제례와도 다른 독창성을 지닙니다. 전자는 정복과 군사적 질서를 강화하는 데 집중했고, 후자는 불이라는 상징을 통해 우주의 순환을 강조했습니다. 반면 아쇼카의 불교 제례는 도덕적 공동체의 형성을 국가적 차원에서 제도화했다는 점에서, 고대 제천 문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4. 오늘날의 계승 – 석주에서 불탑, 그리고 국가 기념일로

아쇼카가 남긴 석주와 칙령은 오늘날까지 인도와 주변 지역 곳곳에서 확인됩니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불교 유적(예: 산치(Sanchi) 불교 유적)의 구성요소로 함께 보존되거나, 국가 사적으로 엄격히 보호되고 있습니다. 특히 사르나트의 ‘사자상’(Lion Capital of Ashoka)은 1950년 1월 26일에 인도의 국가 문장(Emblem of India)으로 채택되어, 현재도 지폐·정부 문서·여권 등에서 확인할 수 있는 현대 국가 상징의 핵심이 되었습니다.

불교 기념 의례의 공공적 위상 또한 지속·확대되었습니다. 오늘날 '베삭(Vesak, 부처님오신날)'은 유엔이 1999년에 국제 기념일로 승인한 이후, 스리랑카·태국·미얀마 등 불교 국가에서 국가 공휴일로 치러지며, 왕실 또는 국가 지도자가 공식 의례에 참여해 국민적 단합을 상징합니다. 이는 아쇼카 치세에 다르마(법)가 공적 통치 이념으로 제기되고 불교가 광범위하게 확산한 역사적 유산이, 오늘날 각국의 국가 행사와 의전 문화 속에서 도덕·자비·비폭력의 가치를 재현하는 형태로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다시 말해, 베트남의 훙왕 기념제나 한국의 환구단 제례처럼 시조·하늘을 통해 국가 정체성을 확인하던 방식과 달리, 불교권의 국가 의례는 보편 윤리(다르마)를 전면화해 사회적 결속을 도모한다는 점에서 다른 차원의 제례적 전통을 보여 준다고 하겠습니다.

 

5. 결론과 나의 의견 – 아쇼카 제례가 남긴 ‘도덕적 제국’의 길

아쇼카 왕의 불교 국가 제례는 고대 아시아 제천 전통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이룹니다. 이전의 제례가 주로 풍요나 전쟁의 승리를 기원하는 성격을 지녔다면, 아쇼카는 칼링가 전쟁에서의 참혹한 경험을 계기로 무력 정복 대신 불살생·자비·관용을 강조하는 불교적 ‘다르마(Dharma)’를 통치의 중심 원리로 삼았습니다. 그는 기원전 약 250년경 제3차 불교 결집을 후원하며 교단을 정비했고, 자신의 새로운 정치 철학을 아쇼카 석주(Aśoka Pillars)와 암각 칙령(Rock Edicts)에 새겨 제국 전역에 널리 반포했습니다. 이 칙령들은 브라흐미 문자와 카로슈티 문자, 프라크리트어, 그리고 일부 지역에서는 그리스어·아람어로도 기록되어, 인도 아대륙을 넘어 아프가니스탄과 헬레니즘 세계의 경계 지역까지 그 영향이 미쳤음을 보여 줍니다.

이러한 전파는 단순한 종교적 확산이 아니라, 국가적 의례를 통해 윤리를 제도화한 이례적 사례였습니다. 베트남의 훙왕 기념제가 신화적 시조를 기리는 방식으로 민족적 정체성을 강화했다면, 아쇼카의 불교 제례는 초국가적 보편 윤리를 전파하며 여러 지역을 하나의 가치 공동체로 묶고자 했습니다. 그의 석주에 새겨진 ‘다르마의 가르침’은 특정 왕조의 권위가 아니라, 인류가 함께 지향할 수 있는 도덕 질서로 이해될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스리랑카·미얀마·중앙아시아 등지로 파견된 아쇼카의 사절단은 불교의 확산을 이끌었고, 이후 아시아 여러 국가에서 불교적 제례가 국가 행사로 자리 잡는 토대가 되었습니다.

저는 이러한 점에서 아쇼카의 불교 제례를 '도덕적 제국의 선언'으로 해석하고 싶습니다. 그는 하늘에 제물을 바쳐 정복을 기원하는 대신, 전쟁의 상흔을 성찰하며 자비와 평화라는 새로운 제국의 규범을 마련했습니다. 오늘날 인도 국장으로 채택된 사르나트 사자상이 보여주듯, 그의 제례적 행위는 단순한 종교의식이 아니라 국가의 상징체계와 국제적 이상까지 아우르는 보편성을 지녔습니다.

현대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의 환구단 제례가 근대적 국가의 정체성을 선언했던 것처럼, 베트남의 훙왕 기념제와 불교 국가들이 치르는 부처님오신날(베삭, Vesak)은 오늘날에도 집단적 기억과 윤리를 사회적으로 재현합니다. 아쇼카의 선택은 단순히 고대 인도의 사건이 아니라, 종교적 의례가 국가와 세계 질서의 도덕적 기반으로 기능할 수 있음을 처음으로 선명히 보여준 사례였습니다. 저는 바로 이 지점에서, 제천 문화가 단순한 과거의 미신을 넘어 인류의 공동 윤리를 형성하는 ‘문명의 언어’였음을 확인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