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구단과 세계의 제천 문화⑦] 마야 제례 – 태양과 옥수수, 인간의 희생
1. 마야 제례의 세계관 – 하늘과 땅을 잇는 천문 질서
고대 마야 문명은 종교·정치·과학이 결합한 독창적 제천 문화를 발전시켰습니다. 마야인에게 하늘은 신들의 언어였고, 태양·달·별의 움직임은 사회 질서를 설명하고 정당화하는 여러 근거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고고학과 상형문자 연구가 축적되면서, 많은 제례 일정과 신전의 배치가 천문 관측과 달력 주기에 맞추어 조정되었다는 사실이 확인되고 있습니다.
치첸이트사의 '엘 카스티요(쿠쿨칸 신전)'는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 줍니다. 춘분·추분 무렵 오후, 계단 난간에 삼각형 그림자가 연속적으로 드리워져 뱀이 기어 내려오는 듯한 형상이 나타납니다. 이 현상은 깃털 달린 뱀의 신 '쿠쿨칸(Kukulkan)'의 강림으로 오랫동안 해석되어 왔고, 그에 맞춘 의례와 축제가 거행되었다고 이해됩니다.
식민기 기록, 특히 '디에고 데 란다(Diego de Landa)'의 보고는 마야의 사제와 통치 엘리트가 천문·달력의 징조를 중시했음을 전합니다. 저는 이 사례에서 인간이 하늘을 관찰하고 그 주기에 자신들의 질서를 접속시키려는 보편적 욕망을 봅니다. 마야의 제례는 단순한 신앙을 넘어, 우주와 인간 사회를 잇는 제도화된 장치로 기능했다고 생각합니다.
2. 태양과 달력 – 주기 속에서 반복된 제례
마야 문명은 세계 고대 문명 가운데서도 가장 정교한 달력 체계를 발전시켰습니다. 260일 주기의 촐킨(Tzolk’in), 365일 주기의 하브(Haab’), 그리고 이 두 체계를 조합한 '장기 달력(Long Count)'은 단순한 시간 기록이 아니라 종교·농경·정치 의례를 결정하는 지침이었습니다.
특히 드레스덴 코덱스(Dresden Codex)에는 금성의 출몰 주기, 일식·월식 계산과 관련된 기록이 남아 있으며, 특정한 시기에 전쟁이나 제례를 거행해야 한다는 지침이 함께 실려 있습니다. 이 기록은 마야인들이 천문학을 단순 관찰에 그치지 않고 사회 제도의 일부로 체계화했음을 보여줍니다.
옥수수는 이러한 달력 의례와 긴밀히 연결되었습니다. 『포폴 부(Popol Vuh)』 신화에 따르면 신들은 옥수수 반죽으로 인간을 빚었습니다. 따라서 옥수수는 생명의 본질이자 인간 존재의 증거였습니다. 매년 파종과 수확기에 옥수수를 신전에 바치는 제례는 단순한 감사 의식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기원을 신에게 되돌려주는 성스러운 행위였습니다.
저는 이 점에서 오늘날 우리의 달력과 사회적 약속을 떠올립니다. 새해나 명절마다 다짐하고 공동체의 유대를 확인하는 현대 사회의 모습은, 고대 마야가 달력을 통해 인간과 신, 그리고 공동체의 관계를 갱신했던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3. 인신공희 – 신과 인간을 잇는 극단적 제물
마야 제례에서 가장 널리 알려지고 충격적인 의례는 인신공희였습니다. 치첸이트사의 세노테(Cenote) 발굴에서는 인골과 보석, 제물 흔적이 다수 출토되었는데, 이는 신에게 바쳐진 희생의 실제 흔적을 보여줍니다.
스페인 정복자 디에고 데 란다와 베르날 디아스의 기록에도 전쟁 포로가 제물로 사용되었으며, 사제들이 피라미드 꼭대기에서 심장을 꺼내 태양에 바쳤다는 묘사가 나옵니다. 귀족 전쟁 포로는 그중에서도 최고로 여겨졌으며, 노예나 어린이, 그리고 간혹 마야 전통 공놀이(pitz) 한 선수도 제물이 되었습니다. 또한 마야의 지도자나 사제 자신도 혀·귀를 베어 피를 흘리거나 손가락을 절단하는 자기희생 의례를 행했습니다. 피는 곧 생명의 정수로 여겨졌으며, 태양이 다시 떠오르고 우주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믿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눈에는 이러한 희생이 잔혹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야인에게 그것은 생존을 위한 필수적 장치였습니다. 저는 이 점에서 인간이 생존의 두려움을 종교적 형식으로 어떻게 극복하려 했는지를 느낍니다. 그들에게 피는 단순한 피가 아니라, 우주와 인간을 연결하는 에너지였던 것입니다.
4. 제단과 신전 – 우주적 무대 위의 의례
마야의 신전과 제단은 종교와 천문학이 결합한 우주적 무대였습니다. 치첸이트사의 쿠쿨칸 신전은 계단 수가 365개로, 1년의 날 수를 상징합니다. 춘분과 추분에는 태양 빛이 뱀 모양 그림자를 드리워 신의 존재를 시각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틱알(Tikal)의 피라미드 신전은 해돋이와 해넘이에 맞춰 축선이 설정되어, 제례와 천체 현상이 일치하도록 설계되었습니다. 팔렌케(Palenque)의 상형문자 비문에는 천체 주기와 관련된 제례 일정이 기록되어 있어, 건축·문자·종교가 통합된 체계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웅장한 신전과 제단이 단순한 종교 건물이 아니라, 사회적 권위와 공동체 결속을 시각화한 장치였다고 생각합니다. 신전에서 거행된 제례는 신에게 제물을 올리는 동시에, 공동체 전체가 하늘과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하는 집단적 체험이었습니다.
5. 환구단과의 비교 – 순간과 지속, 상징과 생존
환구단과 마야 제례는 모두 하늘에 제를 올려 사회 질서를 정당화했다는 공통점을 지닙니다. 그러나 환구단이 정치적 선언과 독립의 순간에 집중되었다면, 마야 제례는 수백 년간 반복되며 공동체의 일상과 우주 질서를 함께 묶어냈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저는 이 차이를 단순히 ‘시간적 지속성의 차이’로만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는 문명이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엇을 지키려 했는가의 차이를 드러낸다고 생각합니다. 환구단은 외세의 압박 속에서 국가의 주권을 지키려는 의지가 응축된 상징이었습니다. 반면 마야 제례는 태양이 지고 다시 떠오를지, 옥수수가 다시 자라날지에 대한 근본적 생존의 불안을 해소하려는 집단적 장치였습니다.
이 두 사례는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엇을 지키려 하는가?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환구단은 역사적 유산으로 남아 있지만, 그 속에는 여전히 주권과 독립을 향한 열망이 깃들어 있습니다. 마야 제례는 지금은 사라졌지만, 태양과 옥수수를 통해 보여준 생존의 절박함은 오늘날 기후 위기와 식량 위기를 겪는 인류에게 낯설지 않은 교훈을 줍니다.
저는 그래서 제례를 단순한 옛날의 종교 행위로만 보지 않습니다. 그것은 문명이 자기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낸 언어이자 장치였습니다. 환구단은 정치적 언어로, 마야는 생태적 언어로 표현했을 뿐입니다. 두 전통은 모두 인간이 하늘에 기대어 자신들의 질서를 설명하려 한 시도였고, 우리는 거기서 지금도 배울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