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구단 답사기

근현대 소공동: 호텔과 상권의 이야기

인포쏙쏙+ 2025. 8. 13. 23:54

1️⃣ 환구단 옆에서 시작된 100년의 이야기 — 조선호텔의 변신과 확장

1914년 10월, 소공동 환구단 일부 터에 ‘조선호텔’이 문을 열었다. 대한제국 시절 하늘에 제사를 올리던 제단이 있던 자리였던 만큼, 개관 초기부터 이곳은 단순한 숙박시설이 아니라 ‘근대적 환대(歡待)의 공간’이자 조선의 대외 창구로 기능했다. 일본 철도청이 건립한 이 서구식 건물은 지하 1층, 지상 4층 규모였으며, 우리나라 최초로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었고,  프랑스식 레스토랑 ‘팜코트’(현 나인스게이트), 서양식 뷔페 ‘갤럭시’(현 아리아) 등 당시 조선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현대식 편의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이는 조선이 국제무대에 발맞추려는 상징적 행보로 해석된다.

건축 설계는 독일계 건축가 게오르그 데 랄란데(Georg de Lalande)가 맡아 격식과 화려함이 공존하는 외관을 완성했다. 조선호텔은 개관 직후부터 해외 외교관, 무역상, 여행객이 이용하는 국제적 사교의 장이 되었고, 환구단의 전통적 ‘왕권의 상징’이 호텔의 ‘현대적 권위’로 옮겨온 듯한 풍경을 연출했다.

광복 이후 조선호텔은 미군 고위 장교 숙소, 이승만 등의 집무실 설치, 미 8군 장교 숙소 등으로 사용되었고,  미군정청 운수국, 대한민국 교통부, 국제관광공사 등으로 운영권이 여러 번 이양되었다. 또한 국제관광공사와 아메리칸항공이 합작투자 하여 1970년 완공된 신축 조선호텔은 지하 1층, 지상 18층 규모의 고층 건물로, 당시 서울에서 가장 현대적인 호텔이었다. 재건축 비용 1,100만 달러는 당시 국내 최대 규모의 관광 인프라 투자였고, 이는 서울을 동아시아 국제도시로 도약시키는 발판이 됐다. 이후 1983년 신세계백화점이 인수해 오늘날의 웨스틴조선호텔이 되었다. 

조선호텔은 환구단의 역사적 상징성을 이어받아, 국제외교 무대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2000년 ASEM(아시아·유럽 정상회의), 2005년 APEC(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 정상회의, 2010년 G20 정상회의 등 세계 정상들의 ‘국제 정상 회의 시 호텔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다. 이는 대한제국 시절 환구단이 지녔던 ‘국제 외교의 무대’라는 의미가, 21세기 호텔 공간에서 재현된 사례라 할 수 있다.

오늘날 웨스틴조선서울은 여전히 환구단 유적과 나란히 서 있으며,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서울의 정치·외교·문화 중심지라는 정체성을 이어가고 있다. 과거 환구단이 하늘과의 소통을 상징했다면, 지금의 조선호텔은 세계와의 연결을 상징하는 장소가 된 것이다.

근현대 소공동: 호텔과 상권의 이야기

 

2️⃣ 호텔 군집지로 변모한 소공동 – 롯데호텔과 프레지던트호텔의 등장

1970년대 들어 서울은 아시아 주요 도시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국제도시로 발전하려는 계획을 본격화했다. 명동과 을지로, 소공동 일대는 그 중심이었다. 1979년, 롯데그룹이 대규모 복합시설인 롯데호텔과 롯데백화점을 소공동에 개관했다. 롯데호텔은 일본 롯데의 자본과 기술이 결합한 초고층 호텔로, 개관 당시부터 국제박람회, 해외 관광객 유치, 비즈니스 행사 유치를 목표로 설계되었다. 이로써 소공동은 조선호텔-롯데호텔의 ‘투톱 체제’를 형성하게 되었고, 이 구도는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한편, 프레지던트호텔은 1970년 개관한 이후 소공동의 또 다른 숙박·연회 거점으로 자리했다. 규모는 조선호텔과 롯데호텔보다 작았지만, 합리적인 가격과 접근성을 무기로 국내외 출장객과 단체 관광객을 끌어들였다. 이들 세 호텔이 형성한 호텔 벨트는 소공동을 ‘서울의 호텔 중심지’로 확고히 만들었다. 호텔의 집중은 곧 국제회의와 외교 행사의 집중으로 이어졌고, 그 결과 소공동 일대는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외교·경제 현장이 되었다.

 

3️⃣ 미국문화원과 명동·을지로와의 연결

소공동의 국제성과 문화적 다양성을 강화한 또 하나의 요인은 미국문화원이었다. 1946년 개관한 주한 미국문화원은 당시 소공동과 명동, 을지로를 잇는 문화·외교 네트워크의 중심이었다. 미국문화원은 단순한 도서관과 강연장이 아니라, 미국 문화를 소개하고 한미 간 우호를 증진하는 상징적 공간이었다. 명동성당, 명동예술극장, 을지로 일대의 영화관, 재즈바, 서양식 카페와 연결되면서 소공동은 외국인과 한국인이 자연스럽게 교류하는 장소가 되었다.
특히 명동과 소공동을 오가는 길목에는 각국 대사관, 외국계 기업 사무실, 언론사들이 자리 잡고 있어, 1960~80년대 이 지역은 서울의 ‘외국인 타운’이자 ‘문화 실험실’로 기능했다. 호텔 로비와 라운지는 단순한 숙박 시설의 일부를 넘어, 문화인·외교관·사업가들이 만나는 사교장이자 정보 교류의 장이었다. 이러한 공간적 특성은 환구단이 과거 외국 사신 접대의 장소였다는 역사적 맥락과 묘하게 맞물린다. 조선시대의 외교 접대 장소가, 근현대에 와서는 호텔과 문화원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국제 교류의 장으로 재탄생한 셈이다.

 

4️⃣ 국제행사와 외교의 무대가 된 소공동

1988년 서울올림픽, 2000년 ASEM(아시아·유럽 정상회의), 2010년 G20 정상회의 등 굵직한 국제 행사들은 소공동 호텔들의 국제적 위상을 크게 높였다. 각국 정상과 대표단이 조선호텔과 롯데호텔, 프레지던트호텔에 묵었고, 주요 회담과 만찬, 기자회견이 호텔 연회장에서 열렸다. 이 시기 소공동은 환구단이 상징하던 ‘국가의 위신을 대외에 과시하는 공간’이라는 역할을 현대적으로 계승했다고 볼 수 있다.
국제행사 유치는 곧 상권 활성화로 이어졌다. 호텔 투숙객과 행사 참가자들은 명동 쇼핑가, 을지로 음식문화, 남대문시장까지 자연스럽게 발길을 옮겼다. 소공동은 숙박·연회·쇼핑·관광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도심형 복합관광지’로 자리 잡았다. 환구단의 역사와 호텔·상권의 현대성이 한 공간에 공존하는 풍경은 서울에서도 독특하다. 제천 의례가 사라진 자리에 세워진 호텔들은, 시대와 형태는 다르지만 여전히 국가의 대외 창구 역할을 수행하며, 소공동의 정체성을 국제도시 서울의 한 축으로 굳혀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