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 선포 이후의 국내 담론 – 지식인과 시민사회의 반응
1️⃣ 독립협회, 대한제국 수립을 자주독립의 상징으로 해석하다
1897년 10월 고종이 환구단에서 황제로 즉위하고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선언하자, 독립협회는 이를 자주독립 국가 수립의 상징으로 강하게 지지했다. 독립협회는 1896년 창립 이래 『독립신문』을 통해 조선이 청의 제후국 체제를 벗어나 ‘황제 중심의 자주국’으로 전환했음을 반복적으로 전파하였고, 이는 독립협회의 정치·사회적 목표와 밀접하게 연결되었다.
『독립신문』은 '대한(大韓)'이라는 국호가 고대 삼한의 역사 위에 새로운 자주 정체성을 부여한다고 강조했으며, 황제 즉위는 외교적 독립을 대내외에 천명하는 정치적 선언으로 해석되었다. 단순한 호칭 변경이 아니라, 국가의 주권과 정체성을 새롭게 구축하는 중대한 전환점으로 본 것이다. 특히 이들은 대한제국의 수립이 청의 간섭을 종식시키고, 서구 열강과 대등한 외교관계를 추구할 수 있는 자격 요건을 갖추게 되었다고 평가했다.
또한 독립협회는 만민공동회, 관민공동회 등을 통해 헌의 6조를 발표하고 의회 설립을 주장했는데, 이는 황제 체제를 무조건 지지한다기보다는, 근대적 정치 질서 속에서 황제권을 견제하고 국민의 정치적 권리를 확장하려는 의도였다. 이 같은 전략은 당시 조선 사회에서 정치참여의 폭을 확대하고, 자주적 근대국가로의 이행을 구체화하려는 시도로 이해된다.
결국 독립협회의 대응은 단순한 정치적 지지를 넘어, ‘대한제국’ 선언을 자주국의 국호 및 황제 지위의 정당성 수립으로 해석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한 사회 개혁 담론을 형성하려는 역사적 실천이었다. 이처럼 독립협회는 환구단에서 집약된 제국 선포의 정치적 상징성을 대중에게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전파하며, 대한제국이 단순한 권력구조 개편을 넘어서 새로운 국가 정체성을 구축하는 이정표가 되도록 만들고자 했다.
2️⃣ 전통 유교계와 보수 지식인들의 반발과 회의
고종이 환구단에서 황제로 즉위하고 대한제국을 선포한 사건은 자주독립의 상징이자 근대 국가 수립의 선언으로 받아들여졌지만, 모든 계층이 이를 긍정적으로 수용한 것은 아니었다. 특히 조선 후기 유교적 명분론에 뿌리를 둔 전통 유생층과 보수 지식인들에게는 이 변화가 위계질서의 붕괴로 비쳤다. 그들은 고종의 황제 즉위를 중국 중심의 사대적 국제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으로 해석하고, 조선의 정통성을 스스로 훼손하는 행위로 간주했다.
대표적인 위정척사 계열 인사인 최익현과 유인석 등은 황제 칭호 사용을 ‘참람한 자존’이라 비판하며, 조선이 국력과 도덕적 위상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황제국을 자칭하는 것은, 오히려 정통성을 훼손하는 무리한 시도라고 보았다. 특히 최익현은 1897년 고종에게 올린 상소에서, 덕이 없는 군주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려 한다면 백성의 마음이 떠나고 천심을 잃게 될 것이라 경고하며, 황제 칭호 철회를 강력히 요청했다. 그는 이를 유교적 대의명분을 어긴 ‘망령되고 참람한 행위’로 간주하였다.
보수 유생들 사이에서는 이러한 비판이 집단적 여론으로 확산하였고, 일부는 상소를 통해 공개적으로 대한제국 선포에 대한 유감을 표명하거나, 황제국 체제를 반대한다고 주장했다. 이 같은 움직임은 단순한 시대착오적 반발로만 볼 수 없다. 전통적 사유 체계 안에서 조선의 정통성과 유교적 전통 질서를 수호하려는 이들의 문제의식은, 기존 체제의 급격한 변화에 대한 반작용이자 유교적 질서에 기반한 정치적 대응이었다.
한편, 윤치호와 같은 개신교 계열의 신지식인 역시 고종의 황제 즉위에 회의적인 입장을 보였다. 그는 황제 선포와 제천의식이 거창한 형식에 불과하며, 진정한 자주독립은 근본적인 정치 개혁과 국민 계몽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했다. 윤치호는 황제 중심 체제 도입이 군주권 강화를 위한 도구로 전락할 위험성을 경고하며, 오히려 이를 통해 전제정치가 강화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결국 대한제국 선포는 근대 국가로의 진입이라는 큰 흐름 안에서 이루어진 역사적 사건이었지만, 내부적으로는 그 정당성과 필요성에 대한 이견이 존재했다. 전통 유교계와 보수 지식인들의 반발은 조선이 수백 년간 유지해 온 외교·정치 질서의 급작스러운 전환에 대한 불안과 위기감의 표출이었으며, 이는 대한제국이 단지 상징적 권위의 재편을 넘어 사회 전반에 걸친 인식의 충돌과 전환을 수반한 거대한 변곡점이었음을 보여준다.
3️⃣ 개화파와 개혁파의 기대와 내부적 갈등
대한제국의 수립을 개화파 내에서는 김홍집·박정양·유길준 등 온건 개화 성향의 관료층이 황제 즉위를 초기에 수용하며, 근대 제도 정비와 헌정 개혁을 통한 국가 발전을 기대했다. 반면 윤치호·이상재 계열은 상징적 선언을 넘어서 의회와 국민 계몽 중심의 개혁을 요구했고, 안경수·정교 계열은 보다 급진적인 정치 변혁과 개혁파 정부 수립을 지향했다.
하지만 내부에서는 개혁의 방향성과 속도를 둘러싼 이견도 존재했다. 일부 개화파는 황제 중심 체제가 오히려 전제정치를 강화할 수 있다고 우려했고, 이에 따라 군주권과 의회권의 균형 문제를 제기했다. 반면 다른 개혁파는 강력한 중앙집권적 황제 체제를 통해 안정적인 개혁을 추진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입장 차이는 1898년의 독립협회 해산과 이후 헌의 6조의 미이행, 의회설립 실패 등으로 이어지며 표면화되었다. 개화 세력 내의 전략적 불일치는 개혁 동력을 약화시켰고, 그 틈을 타 보수 반대파가 정치 주도권을 회복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대한제국은 자주적 근대국가라는 외피를 갖췄지만, 내적으로는 정치 세력 간 갈등과 개혁 추진력의 부족으로 인해 본격적인 체제 전환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이는 단순한 제도 도입 이상의 정치적 합의와 국민적 참여가 근대화의 핵심임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4️⃣ 민중의 인식과 사회적 반응 – 기록 너머의 목소리
당시 민중의 반응에 대한 직접적인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간접 자료와 정황을 통해 일정한 해석이 가능하다. 민중은 ‘황제’라는 호칭과 그 개념에 대해 기존의 ‘왕’과 무엇이 다른지 명확히 인지하지 못한 채, 변화에 대한 궁금증과 혼란을 느꼈을 가능성이 높다.
서울과 개항장 등 도시 지역에서는 대한제국 선포 이후 새로운 군복 착용, 화폐 도안의 변경, 관청 간판 교체 등 눈에 띄는 변화가 발생했고, 이는 민중에게 실질적인 체제 전환의 신호로 받아들여졌다. 반면 농촌 지역에서는 이러한 변화가 느리게 확산되었고, 구체적인 반응보다는 조세, 군역, 토지 문제 등 현실적 생계에 더 집중하고 있었다.
또한 일부 지방에서는 대한제국 수립이 단지 왕의 호칭을 바꾼 것일 뿐 실질적인 삶에는 큰 변화가 없다고 인식되기도 했다. 이는 조선 후기에서 대한제국으로의 전환이 민중의 삶 속에서는 상징적 의미 이상으로 확산되기 어려웠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환구단에서의 황제 즉위식은 민중에게 시각적으로 강한 인상을 남겼다. 특히 서울 도성 인근 주민들에게는 제천의식, 행렬, 의장 등의 시각적 요소가 체제 변화의 일면을 각인시켰고, 이는 환구단이 단순한 종교적 공간을 넘어 정치적 상징 공간으로 기능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시각적 체험은 제국 수립이라는 국가 전환 과정을 민중이 시각적으로 인식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드문 기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