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구단과 정동 공간사⑦] 정동의 길, 제국의 질서
1️⃣ 정동의 탄생과 근대도시 질서의 전환점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 정동 일대는 조선과 대한제국의 외교·정치·종교·교육 시설이 집중되면서 근대 도시공간으로서의 성격을 갖추기 시작했다. 이 변화는 단순한 건축 양식의 전환이나 서구식 제도 도입 차원을 넘어, 기존의 봉건적 도시구조를 해체하고 새로운 도시 질서를 시도한 시발점이었다.
전통적인 한양 도성은 종묘, 사직, 경복궁을 중심으로 ‘유교적 정치 공간’으로 설계되었으나, 정동은 이와 다른 궤도에서 성립되었다.
정동 일대는 1880년대 중반부터 미국·러시아 등 외국 공사관이 속속 들어서기 시작했다. 1885년에는 아펜젤러가 배재학당을, 같은 해 10월에는 정동제일교회를 창립했고 1886년에는 이화학당이 설립되면서 정동은 ‘근대 교육 기능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1890년에는 러시아 공사관이 완공되었고,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경운궁과 환구단을 정동 일대에 배치하며 이 지역은 정치·외교·교육·종교가 교차하는 서울 최초의 ‘국제 네트워크 도시’가 되었다.
정동의 물리적 공간은 당시 도시계획이나 행정에 의한 체계적 개발이 아닌, 외국 공사관과 종교기관, 고종의 궁궐 이전 등 정치적 요인들에 따라 무정형적으로 확장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동은 서울의 첫 근대적 '네트워크 도시'가 되었다. 이곳에서는 다양한 민족, 언어, 제도, 문화가 실시간으로 교차했고, 그 중심에는 고종의 정치 구상과 환구단 건립이 있었다.
2️⃣ 환구단과 정동 네트워크의 정치적 중심성
환구단은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건립한 황제 즉위 의례 공간이었다. 환구단의 공간적 위치는 단순히 종묘·사직과의 대비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이는 정동이라는 외교와 근대기능이 집약된 공간 속에 ‘제국의 통치 상징’을 심은 행위였다.
정동은 외국 공사관이 밀집한 국제 외교 지구였고, 고종은 이 지역의 외교적 상징성과 환구단의 제국적 권위를 맞물리게 하여 외부 세계를 향한 대한제국의 독립과 자주를 선언하려 했다. 환구단은 덕수궁(경운궁)과 인접해 있었으며, 고종은 경운궁으로 거처를 옮기고 직접 외교 사절을 맞이하거나 국제적 행사에 응했다. 이 시기 환구단과 덕수궁 사이의 길, 즉 정동길은 황제의 공식 행차나 외교 사절의 통행로로 활용되었다.
고종의 의도는 정동을 ‘서울의 새로운 중심축’으로 삼는 것이었다. 궁궐과 제단, 외국 공사관과 종교시설, 근대 학교들이 동시에 밀집한 정동은 새로운 근대도시의 질서와 권력 구조가 교차하는 지점이었다. 그러나 이는 곧 제국주의 열강과 일본 제국의 압력 속에서 흔들리기 시작했고, 환구단의 상징성은 오래 유지되지 못했다.
3️⃣ 정동의 거리, 서구 질서의 도입과 공간의 서사
정동은 조선과 대한제국 시기의 몇 안 되는 ‘도시 서사’를 품은 공간이었다. 정동길은 단순한 도로가 아니라, 조선 후기의 골목길 구조와는 전혀 다른 도시 문명의 전환을 보여주는 흔적이다. 이 거리에는 도시 설계의 근대적 요소들—직선화된 도로, 명확한 건물 배치, 사적과 공적 영역의 구분—이 혼재했고, 이는 도시의 서사적 기능을 갖게 했다.
1900년대 초반, 정동길을 따라 산책하는 행위는 상류층의 문화로 자리 잡았다. 덕수궁 돌담길은 당시 외국인 사절뿐만 아니라, 대한제국 고관, 근대 교육기관 학생들이 자주 오가던 길이었다. 이 길은 물리적 경계를 넘어서, 정동이라는 공간의 사회적 위계와 문명적 질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통로였다.
그러나 이 거리에는 외부로부터 주입된 도시 질서가 작동하고 있었다. 외국인 교사와 선교사, 공사관 직원과 그 가족들은 자신들의 생활공간을 점차 확장하며 정동을 서구식 거주지로 재편했고, 이는 고종의 황제권 강화 의도와 때로 충돌하기도 했다. 대한제국 정부는 이 지역에 일정한 질서를 부여하려 했지만, 실제 통제는 외국 세력과 종교기관에 상당 부분 넘겨진 상태였다.
결과적으로, 정동은 '외부에 의해 설계된 도시'이면서도 '내부 권력이 미완으로 투사된 공간'이라는 모순을 안고 있었다. 이는 환구단이라는 제국 상징이 정동 중심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상징이 지속적인 힘을 갖지 못한 구조적 배경 중 하나였다.
4️⃣ 해체된 제국과 잊힌 도시 기억
1910년 한일 강제 병합 이후 정동은 식민지 도시 공간 재편의 주요 대상이 되었다. 덕수궁은 전통 궁궐로서의 위상을 상실하고, 일부 건물은 공공시설 및 문화공간으로 개조되었다. 외국 공사관들은 대부분 철수하거나 기능을 상실했고, 그 일부는 일본 당국이나 민간에 의해 공공 행정 기능으로 활용되거나 흡수되었다. 1913년 환구단이 철거되고 조선호텔이 들어서면서 정동은 근대 제국의 상징에서 식민 도시의 외피로 급격히 변모하였고 정치적·종교적 위상은 근본적으로 붕괴되었다.
정동은 식민지 시기 내내 ‘근대적 외래 질서의 흔적’으로만 남았고, 그 도시적 기능이나 기억은 의도적으로 지워졌다. 광복 이후에도 정동은 역사 재생이나 기억 복원의 중심에서 밀려 있었으며, 외국 공사관이나 교회 건물은 문화재로 보존되었으나 그 주변의 역사 서사—환구단과 연결된 제국의 공간 실험—는 제대로 복원되지 않았다.
서울시의 도시재생 프로젝트가 진행되면서 정동은 다시 주목받고 있지만, 여전히 ‘경관 복원’ 중심이다. 환구단, 덕수궁, 공사관 건물 등을 따라 이어지는 역사 경로는 있지만, 그 안에 담긴 제국기 도시공간의 실험과 실패, 제국의 길과 근대 질서의 모순은 설명되지 않는다.
정동의 길은 단순한 관광로가 아니라, 제국이 도시를 어떻게 상상했는지를 보여주는 흔적이다. 환구단이 단지 제단이 아닌, 근대 도시계획의 일부였음을 복원하는 작업이야말로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기억의 도시화’이며, 이는 곧 역사와 공간, 정치와 기억을 잇는 시민의 실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