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구단 답사기

[환구단과 정동 공간사⑤] 정치·외교 분야의 잊힌 인물들

인포쏙쏙+ 2025. 7. 29. 23:34

1️⃣ 고종의 외교 실험과 정동 외교 지구의 탄생

대한제국의 황제 고종은 환구단을 건립한 1897년을 기점으로, 국가 체제를 근대국가로 전환하고자 하는 외교적 시도를 본격화했다. 종묘·사직과 같은 전통적 유교 공간과 달리, 환구단은 명확하게 황제 중심의 제국적 이념을 상징하는 공간이었고, 그 주변 정동은 외국 공사관과 근대 시설들이 집중된 국제 외교 지구로 발전했다. 고종은 이 공간적 밀집성을 활용하여 정치·외교의 핵심 무대로 정동을 전략적으로 활용했으나, 정작 이곳에서 활동한 주요 인물들에 대한 기억은 현재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오늘날 환구단과 정동 일대를 둘러보면, 당시 외교 네트워크를 형성했던 조선·대한제국의 외교관들은 거의 언급되지 않거나 잊힌 상태다.


2️⃣ 잊힌 외교관: 초대 주미공사 박정양

 

박정양(朴定陽, 1841~1905)은 조선 말기의 외교관이자 개화파 정치인으로, 조선이 1882년 미국과 수교한 이후 1887년 초대 주미 전권공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워싱턴 D.C.에 조선 공사관을 설치하고 미국 정부, 의회, 언론계 인사들과 활발한 외교 활동을 벌였으며, 조선의 위상을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박정양은 당시로서는 드물게 근대 외교의 방식을 이해하고 주도적으로 활용한 인물이었다. 그는 단순한 외교 서신 교환을 넘어, 조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정치적 발언과 교섭을 지속했으며, 그의 활동은 조선 말기 외교의 전환점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오늘날 그의 외교문서와 보고서는 당시 외교 현실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사료로 남아 있지만, 정동이나 환구단 인근에는 그의 흔적이나 업적을 기리는 공간은 거의 없다.

특히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직후, 박정양은 이를 반대하는 상소문을 올리며 대한제국의 자주권을 지키고자 했다. 외교관 출신으로서 열강 사이에서 균형 외교를 통해 국가의 독립을 유지하려 했던 그의 노력이 강대국의 압력 앞에서 끝내 좌절되었다는 점은, 그 생애와 외교 활동이 오늘날 더 널리 조명되어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3️⃣ 잊힌 외교관: 초대 주러공사 이범진

 

이범진(李範晋, 1852~1911)은 조선 말기의 대표적인 친러 외교관이자 외교전략가였다. 그는 고종의 신임을 받아 법부대신, 주러시아 공사 등을 지내며 러시아를 통한 조선의 자주외교를 모색했다. 특히 1896년 아관파천 직후,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던 고종을 보좌하며 조선의 정치적 독립을 위한 외교활동을 펼쳤다.

이범진은 서구 열강 가운데 러시아를 통한 외교 연대를 가장 현실적인 방파제로 판단했고, 이를 기반으로 대한제국의 생존 전략을 구상했다. 그는 러시아 고위 인사들과의 교섭을 통해 조선의 주권을 국제적으로 보장받으려 했으나, 일본의 제국주의적 팽창과 열강의 각축 속에서 그 전략은 점차 한계를 드러냈다.

1901년 그는 초대 주러 전권공사로 임명되어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본격적인 외교 활동을 전개했고, 러시아와의 관계를 강화하기 위한 다양한 외교적 시도를 이어갔다. 이범진은 대한제국의 외교적 입지를 확장하는 데 기여했을 뿐 아니라, 아들 이위종이 1907년 헤이그 특사로 파견되는 데 있어 외교적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이위종은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해 일본의 침략 실상을 국제사회에 폭로했으며, 이는 이범진 가문이 대를 이어 독립운동과 외교 활동에 헌신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조선 외교권이 박탈되면서 그는 공직에서 물러났고, 이후 만주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그러나 일제 강점 이후 그의 활동은 친러 외교의 한계로만 평가되며 사실상 잊혀졌다. 오늘날 이범진은 환구단이나 정동 일대의 외교사에서 거의 언급되지 않는 인물이지만, 그의 외교 전략은 대한제국이 직면한 국제 질서 속 생존 문제를 가장 현실적으로 고민한 사례로 평가할 수 있다.


4️⃣ 외국 공사관 인물들: 정동 외교무대의 숨은 주연들

 

정동에는 19세기 말부터 미국, 영국, 러시아, 독일 등의 공사관이 자리 잡았고, 이들 외국 공사관 인물들과 조선 외교관 간에는 다양한 외교적 접촉이 이뤄졌다. 예컨대 미국 공사 호러스 알렌(Horace Allen)은 갑신정변 때 민영익을 치료한 인연으로 고종의 신임을 얻은 후, 주한 미국공사로서 외교뿐 아니라 의료·교육 분야에서도 깊은 영향을 끼쳤다. 그는 광혜원(1885, 훗날 제중원)의 설립을 주도하고, 배재학당 개교에도 외교적 뒷받침을 제공했다. 그러나 이 시기 외국 공사들과 조선 외교관들 간의 구체적인 협상 과정, 갈등 조율, 정책적 입장 차이 등은 오늘날 거의 기억되지 않으며, 관련 사료도 제한적이다. 정동의 외국 공사관 건물은 문화유산으로 보존되고 있으나, 그 안에서 오갔던 외교 전략과 조선 외교관들의 활동 내용은 현재 전시나 해설에서는 미비한 수준이다. 이는 단순한 공간 보존을 넘어서, 그 공간에서 활동했던 인물들과 외교 행위에 대한 복원이 병행되어야 함을 시사한다.


5️⃣ 잊힌 외교의 공간과 기억의 복원 과제

 

오늘날 환구단 일대는 단편적인 상징 공간으로만 남아 있으며, 정동 또한 외국 공사관 건축물 중심의 '경관 보존' 위주로 관리되고 있다. 그러나 이 공간들은 단지 물리적 유산이 아니라, 조선과 대한제국이 독립과 생존을 위해 벌였던 치열한 외교의 현장이었다. 앞서 소개한 박정양, 이범진 같은 인물들의 생애와 전략은 단지 개인의 업적을 넘어, 공간의 역사성과 연결되어야 할 중요한 기억이다. 외교는 건물이나 제도만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그 안에서 움직인 사람들, 그들이 엮은 네트워크, 교섭의 문서와 언어, 의도와 결과까지가 모두 외교의 역사다.

서울시는 최근 환구단과 정동 일대를 포함한 역사도시재생 정책을 추진하고 있으나, 그 내용은 여전히 물리적 공간 복원과 관광 동선 중심에 머무르고 있다. 이제는 공간을 중심으로 한 인물사, 특히 잊힌 외교관과 그들의 실천을 함께 복원하는 방향으로 정책 전환이 필요하다. 이것이야말로 환구단과 정동이 단순한 옛터가 아닌, 오늘날에도 살아 있는 역사 공간으로 재탄생하는 길이다.

[환구단과 정동 공간사⑤] 정치·외교 분야의 잊힌 인물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