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구단과 정동 공간사③] 해체와 재기억 – 일제강점기와 광복 이후
1️⃣ 일제의 권역 해체 전략: 물리적 해체와 상징의 말살
1900년대 이후 일제는 대한제국의 상징 공간을 체계적으로 해체했다. 특히 정동과 환구단 권역은 고종의 정치·외교·문화 전략이 집약된 장소로서 일제의 우선적 통제 대상이 되었다. 일제는 환구단 천단을 1913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조선호텔을 건립함으로써 제국 통치의 공간을 물리적으로 말살하고, ‘천자국’ 대한제국의 상징을 일상에서 지워냈다. 이는 단순한 개발 사업이라기보다는, 대한제국의 상징적 의례였던 천제 의식을 무력화하고 그 기억을 지우기 위한 의도적 기획이었다. 이와 함께 중명전은 궁내부 소속 공간에서 일본 통감부의 행정 관할로 넘어가며 외교의 전초기지라는 기능을 박탈당했다. 정동교회와 배재학당 등 서양 세력과의 연계 지점 역시 일본의 감시 체계 안에 놓이게 되면서 그 정치성은 사실상 봉쇄되었다.
이러한 공간 해체는 단순한 물리적 철거를 넘어서 상징의 제거이자 전도된 기억의 주입이었다. 덕수궁은 전통 궁궐의 기능을 박탈당하고, 내부 전각들은 박람회장, 창고, 미술관 등으로 전환되며 궁궐 본연의 권위가 흐트러졌다. 1910년대 이후 조선총독부는 경성 시가지를 재편하며 정동 일대를 관공서와 외국인 전용지대로 설정했으며, 이는 고종이 구상했던 ‘문명국가로서의 구역 전략’을 식민 통치의 편의주의적 지도로 대체하려는 시도였다. 정동에 집중된 서양식 교육, 종교, 외교 시설은 일제에 의해 철저히 감시되었고, 그 네트워크는 해체 또는 약화되었다. 이는 권력 공간을 지우는 동시에 기억의 기반을 흔드는 전략이었다.
2️⃣ 문화 통제와 기억의 식민화: 교육과 매체를 통한 인식 전환
일제는 환구단과 정동 권역의 정치성과 상징성을 단순히 제거하는 것을 넘어, 조선인의 공간 인식을 식민지적 이데올로기에 맞게 전환하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교육과 언론, 종교 등 일상적인 문화 매체가 총동원되었다. 대표적으로 조선교육령과 조선사 편수회의 활동은 역사 왜곡의 제도화된 도구였으며, 교과서에서는 대한제국의 수립이나 고종의 천제 의식이 철저히 배제되었다. 고종은 ‘무능한 군주’로, 대한제국은 ‘일본의 보호 없이는 존속할 수 없었던 불완전한 정권’으로 묘사되었고, 반면 조선신궁과 조선총독부 청사는 ‘근대 문명의 상징’으로 포장되었다.
이와 동시에 언론 통제와 치안유지법의 적용으로 환구단, 중명전, 정동교회 등 고종과 관련된 공간은 공적 담론에서 철저히 배제되었다. 신문과 잡지에서는 해당 공간이 언급되지 않거나 ‘외국인 거주지’, ‘구시가지’ 등의 중립적 표현으로 대체되었고, 이는 조선인의 기억 속에서 공간의 역사성을 흐리게 했다. 이러한 기획은 단순한 검열을 넘어, 조선인의 자발적 망각을 유도하는 ‘기억의 식민화’ 전략이었다.
더 나아가 일제는 대한제국의 제의 공간을 폐기하고, 남산에 자신들의 종교 상징인 조선신궁을 1925년에 건립했다. 이는 제의 질서의 중심을 고종의 천제에서 일본 천황 중심으로 전환하는 상징적 조치였다. 1930년대 후반부터 본격화된 신사참배 강요는 조선인의 정신을 제국 질서에 편입시키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시도였으며, 환구단의 제례 전통을 구조적으로 대체하려는 기획이었다.
3️⃣ 해방 이후의 공간 복원과 서사의 공백
1945년 광복 이후, 환구단과 정동 권역은 다시 조명을 받기 시작했으나, 복원은 부분적으로만 이뤄졌다. 환구단은 원형 복원이 아닌 ‘환구단 유적’의 일부로 정리되었고, 기존 천단은 복구되지 않은 채 단지 석조 황궁우만이 남게 되었다. 이는 독립 국가로서 자주적 역사를 복원하기엔 물리적 한계와 정치적 여건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기 때문이다. 해방 후에도 수십 년간 환구단은 호텔 부지로 활용되며 역사적 맥락과는 무관한 상업 공간으로 재편되었고, ‘근대 국가 선포의 공간’이라는 원래의 의미는 대중적으로 널리 공유되지 못했다.
정동의 중명전은 1973년 문화재로 지정되면서 복원 작업이 시작되었지만, 여전히 덕수궁과의 물리적 연결성 없이 고립된 형태로 남아 있다. 정동교회는 계속해서 운영되고 있으나, 고종의 외교 전략과의 연결성은 학술적 관심에만 한정되어 있다. 이러한 점에서 광복 이후의 공간 복원은 물리적 재현보다는 상징 회복의 측면에서 미완의 상태에 머물러 있다.
공간의 복원이 곧 기억의 복원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1990년대 이후에야 환구단과 정동 권역의 역사적 의미를 조명하려는 연구와 전시가 본격화되었으며, 일부 시민단체와 학자들의 노력으로 고종의 ‘정동 전략’에 대한 재조명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대중적 인식은 낮은 편이며, 관련 서사 역시 교과서와 대중 매체에서 비중 있게 다뤄지지 않는다. 이는 공간의 상징성이 회복되기 위해선 단순한 복원이 아니라, 지속적인 역사 교육과 문화적 재해석이 병행되어야 함을 시사한다.
4️⃣ 이데올로기의 시간성과 공간의 정치성
환구단과 정동 권역은 시대의 이데올로기에 따라 구성과 해체, 기억과 망각이 반복된 공간이었다. 대한제국기에는 제국의 자주성과 문명화를 상징하는 전략적 공간으로 기능했지만, 일제강점기에는 그 모든 상징이 지워지고 식민 권위의 무대가 되었다. 광복 이후 복원이 시도되었으나, 여전히 역사적 맥락의 단절과 인식의 공백은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공간의 역사적 흐름은 단순한 장소의 변화가 아니라, 권력과 이념, 정체성이 맞물리는 ‘정치적 장소성’의 문제이다. 환구단은 더 이상 천제를 올리는 공간이 아니지만, 여전히 대한제국의 자주적 근대화 의지를 증언하는 상징 공간으로 기능할 수 있다. 정동 역시 단지 외교의 중심지가 아닌, 제국의 운명을 설계하던 실험 공간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이 공간들을 어떻게 복원하고, 기억하며, 재해석할 것인지는 곧 한국 사회가 자신의 근대사를 어떻게 바라보는지의 척도가 될 것이다.
결국, 공간은 과거의 산물이 아니라 현재의 선택이다. 환구단과 정동의 권역이 우리 기억 속에 온전히 복원될 때, 비로소 우리는 단절된 역사를 다시 연결하고, 주권과 자주의 서사를 온전하게 되살릴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