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무개혁과 환구단의 세 시기③] 제국 쇠퇴기, 환구단의 그림자
1️⃣ 러일전쟁과 외세의 격돌: 조선반도의 지정학적 재앙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발발하면서 대한제국은 다시 한번 열강의 각축장 한가운데로 내몰렸다. 일본은 전쟁의 전초로 조선을 선점하려 했고, 러시아는 만주와 조선을 연계하는 전략적 요충지를 확보하려 했다. 이러한 대립 속에서 대한제국은 중립을 선언했지만, 일본은 이를 무시하고 조선 내 군사 점령을 감행했다.
1904년 2월 23일 체결된 ‘한일의정서’는 조약의 외형을 취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일본이 대한제국 영토에서 자유롭게 군사작전을 펼칠 수 있도록 한 조치로, 대한제국의 영토 주권을 침해하는 조약이었다. 조선은 선택권 없이 이 조약에 서명해야 했고, 이는 외교권 박탈로 이어지는 을사늑약의 전단계가 되었다. 환구단에서 천명한 자주독립의 이상은 국제 정치의 냉혹한 현실 속에서 무너져갔다. 대한제국은 자국 영토에서조차 외국 군대를 통제하지 못하는 처지로 전락했고, 국가 주권은 점차 실질적 효력을 잃어갔다.
고종과 대한제국 정부는 일본의 일방적 군사행동에 대해 외교적 대응을 시도했지만, 러시아와 일본의 충돌이라는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서 대한제국의 목소리는 국제무대에서 사실상 묵살되었다. 자주와 독립을 천명했던 환구단의 의미는, 외세가 자국의 영토를 유린하는 모순된 현실 속에서 점점 퇴색되어갔다.
2️⃣ 정치 체제의 붕괴: 내각 개편과 고종 퇴위
전쟁이 격화되면서 대한제국은 정치적으로도 급속히 흔들렸다. 일본은 전쟁의 승기를 잡아가면서 대한제국 정부에 대한 영향력을 더욱 강화했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직전까지, 고종은 친러파 인사들을 등용하고 외교적 균형을 유지하려 했으나, 일본은 통감부 설치와 내정 간섭을 가속화하며 제국의 내각을 사실상 무력화시켰다.
1905년 11월 17일, 일본은 군대를 동원해 궁궐을 포위한 채 을사늑약을 강제 체결했다. 이 조약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일본에 이양하는 것으로, 자주국가로서의 위상은 결정적으로 무너졌다. 이후 환구단은 더 이상 국가의 대외적 위상을 과시하는 공간이 아니라, 제국 쇠퇴의 침묵을 간직한 채 남겨진 상징이 되었다.
1907년에는 고종이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만국평화회의에 고발하기 위해 헤이그 특사를 파견했으나 실패로 돌아갔고, 일본은 이를 구실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켰다. 이후 즉위한 순종은 실권 없는 황제로 남았고, 대한제국의 정치 체제는 명목상 존재하는 껍데기에 불과했다. 환구단은 이러한 정치적 격변 속에서 점차 의례와 정치 행위의 중심에서 멀어져 갔다.
3️⃣ 환구단의 침묵: 철거와 잊힘의 역사
1909년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 이후 일본의 내정 간섭은 극에 달했다. 국권 침탈은 이미 계획된 수순처럼 진행되었고, 1910년 한일병합조약을 통해 대한제국은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그 과정에서 환구단은 점차 제국의 흔적으로서 자리조차 위협받게 되었다.
1913년, 조선총독부는 환구단의 전각 대부분을 철거하고, 그 부지에 철도호텔(현 웨스틴조선호텔)을 세웠다. 황궁우(皇穹宇)만이 간신히 존치되었고, 나머지 건물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환구단은 이제 제국의 천제 의례가 아니라, 일제의 근대식 호텔이 들어선 자리로 전락했다.
이처럼 환구단의 침묵은 단순한 물리적 철거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대한제국이라는 국가적 비전이 해체되어 가는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과정이었다. 자주와 독립의 이상이 시작된 공간이, 타국의 상업적 시설로 대체된다는 사실은 제국의 몰락을 더욱 뼈아프게 각인시켰다.
4️⃣ 환구단, 남겨진 유산과 현대적 재해석
오늘날 서울 도심 한복판, 소공동에 있는 환구단은 사적 제15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2009년에는 환구단의 정문을 복원하였고, 2025년에는 정문의 담장을 걷어 열린 정원 조성 및 그 주변이 정비되는 등의 보존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환구단의 존재와 역사적 의미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여전히 제한적이다.
환구단은 단순한 제사 유적이 아니다. 그것은 대한제국이 꿈꿨던 근대국가의 비전, 자주와 독립의 천명, 그리고 그것이 외세와 내부 모순에 의해 붕괴되어가는 과정을 고스란히 품고 있는 공간이다. 현대의 관점에서 환구단은 실패한 제국의 상징이 아니라, 근대화를 향한 고종의 치열한 실험과 그 역사적 교훈을 반추하게 하는 장소다.
문화재청과 서울시는 환구단의 역사적 가치를 복원하고 재조명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으며, 환구단을 단순한 유적이 아닌 살아 있는 역사 교육의 장으로 발전시키기 위한 다양한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다. 이는 단지 과거를 기리는 일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지켜야 할 자주와 주권의 의미를 되새기는 작업이기도 하다.
5️⃣ 환구단, 이상과 현실의 경계에 서다
환구단은 고종이 선포한 자주독립 국가의 중심이자, 광무개혁의 출발점이었다. 그러나 1904년 러일전쟁을 기점으로 외세의 침탈과 내부의 혼란은 대한제국의 기반을 빠르게 약화시켰고, 환구단은 제국의 쇠퇴와 함께 그 기능과 위상을 상실해 갔다.
1913년 환구단 철거는 단순한 건축물의 소멸이 아닌, 제국의 비전과 주권이 해체되는 과정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이제 남겨진 황궁우는 그 모든 격동을 견딘 채,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환구단은 패배의 유산이 아니라, 제국의 실험과 그 한계, 그리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주권’과 ‘자주’의 가치를 되묻는 역사적 현장이다. 우리는 이 공간을 통해, 단순한 과거 회고를 넘어 미래로 이어지는 성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